조기 유학 행렬 ‘아시아 러시’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5.01.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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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권 국가들이 조기 유학의 새로운 메카로 떠오르고 있다. 미래 없는 한국 교육의 탈출구가 되고 있는 아시아 유학 열풍의 실상을 점검한다.
아시아 조기 유학 열풍이 불고 있다. 교육인적자원부에 따르면, 2003학년도에 유학하기 위해 출국한 초·중·고생은 1만4백98명이다(왼쪽 표 참조). 이 가운데 동남아시아 국가로 떠난 학생은 한 해 동안 3천명이 넘고, 중국까지 합하면 5천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많은 학생들이 아시아 국가로 조기 유학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구미 국가보다 적은 교육비로 영어와 외국 문화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캐나다에 있는 사립 학교에서 공부하려면 생활비까지 포함해 연간 2만~3만 달러가 들지만, 아시아권에서는 연간 5천~1만 달러면 해결할 수 있다.

자유분방한 구미에 견주어 아시아권은 보수적이고 주변 환경이나 정서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 또한 부모들을 안심하게 만든다. 아시아 조기 유학의 또 다른 매력은, 한국에서 거리가 멀지 않아 부모들이 자주 오갈 수 있다는 점이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한국 교육에 대한 절망감에 있다. 미래가 없는 한국 교육에 희망을 거느니 나라 밖에서 찾아보겠다는 것이다.




■ 중국

경제대국 ‘비전’이 매력


아시아권 가운데서도 한국 학생이 가장 많이 찾는 나라가 중국이다. 초중고생 2천명 가량이 매년 중국으로 떠난다. 한국과 가장 이웃한 나라이고, 세계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비전 때문이다. 한국 학생들이 가는 학교는 중국의 상위 계층 자녀들이 수학하는 곳이어서 일찍부터 ‘관시’(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영어와 중국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좇을 수 있다는 점도 중국 유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문제는 이름 있고 시설 좋은 명문 학교는 이미 한국 학생들이 포화 상태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금동중국유학센터 이경석 대표는 “전체 학생 5백명 가운데 한국 학생만 100명이 넘는 학교도 많다”라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국제부와 본과(중국인 반)를 나누어 중국어를 모르는 외국인은 따로 수업하게 하는 학교도 꽤 많다. 국제부에서는 중국어로 수업하되 진도를 천천히 나아간다. 중국 학생들처럼 중국어를 잘하고 수학 능력이 뛰어나지 못하면 본과에 합류할 수 없다.

많은 한국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국제부에서만 공부하기 때문에 중국 친구들과는 만날 기회가 적다. 또 한국인이 선호하는 학교는 학비 또한 만만치 않아서 학비만 연간 1만 달러를 훌쩍 넘어선다.

중학교 1학년 때 중국으로 건너간 안상현군(베이징 4중 1년)은 3년째 중국에서 공부하고 있다. 안군은 그동안 열심히 노력한 결과 현재 중국 아이들과 함께 본과에서 공부하고 있다. 유학하고 싶었던 나라는 원래 미국이나 캐나다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피아노와 미술에 흠뻑 빠져 있던 그는 피아노와 미술 공부를 하고 싶어서 중학교 과정을 스스로 포기했다. 낮에는 피아노와 미술 공부를 하고, 저녁에 학원에서 공부하며 4개월 만에 중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이 무렵 안군은 인터넷을 통해 ‘영어의 바다’에 빠져들었고, 영어를 잘 하려면 유학을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부모는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아버지 안병선씨(49·개인사업)는 “미국이나 캐나다로 유학하려면 돈이 많이 들고 탈선하는 아이들도 많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내키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대신 아버지는 아들을 중국에 보냈다. 중국어라고는 한마디도 할 줄 몰랐던 안군이 처음 정착한 곳은 시안이었다. 시안의 환경은 기대 이하였다. 의사 소통 문제는 감수할 수 있었지만 열악한 학교 시설과 환경은 어린 안군이 참기에는 버거웠다. 물 사정이 좋지 않아 기숙사에서는 이틀에 한번 정해진 시간에만 샤워를 할 수 있었다. 그나마 온몸에 비누칠을 한 상태에서 더운 물이 끊겨 덜덜 떨며 ‘냉수 마찰’을 한 적도 많다. 화장실 물을 내리지 않는 중국 아이들 습관 때문에 더러운 화장실을 코 막고 이용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안군은 “차라리 군대가 더 편하겠다는 형들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고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아 툭하면 배탈이 났고, 제대로 먹지 못해 체중이 몇 달 만에 8kg이나 빠지기도 했다.

그런 현실을 눈으로 확인한 어머니는 안군을 베이징으로 전학시켰다. 천만원이 들었던 시안보다 베이징에서는 유학 비용이 두 배쯤 더 들었다. 시안에서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중국 최고의 명문 학교로 꼽히는 베이징 4중으로 전학할 수 있었다. 안군은 6개월 만에 본과에 합류해 중국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기 시작했다.

베이징 4중은 시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중국에서도 내로라 하는 수재이자 재력가나 권력가의 자식들이 전부 모인 곳이었다. 중국 아이들은 영어는 물론 모든 과목에서 실력이 탁월하다. 안군은 “이 학교에서는 오히려 중국 학생들이 한국 학생들을 무시한다. 중국어나 다른 과목 공부를 못하면 업신여기는 중국 친구들이 있다”라고 말했다.

안군은 베이징 4중을 졸업하고, 칭화 대학 의대에 입학하는 것이 목표다. 그는 “나처럼 스스로 선택한 사람도 힘든데, 부모님이 억지로 보낸 친구들은 얼마나 괴롭겠는가. 그런 친구들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부모님께 전화하면 졸업할 때까지 돌아올 생각 말라고 야단만 듣는다고 한다. 그러니 공부보다는 노는 쪽에 더 관심을 두기도 한다. 그렇게 지낼 바에야 차라리 한국에서 공부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대학생이 된 유지웅씨(20·톈진 대학 토목건축과 1년) 역시 중국에서 힘겨운 유학 생활을 보냈다. 유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중국으로 갔다. 유씨는 “공업고등학교를 다니던 내가 한국에서 좋은 대학에 가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게다가 학교 생활이 재미가 없어 공부할 마음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유씨는 강대국으로 떠오르는 중국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반대했던 부모도 유씨가 1년 동안 유학원과 인터넷을 뒤지며 유학 준비를 하자 마음을 바꾸었다.

중국으로 건너간 유씨는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의사 소통을 하려면 영어와 중국어를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었고, 주변 환경이나 수업 내용이 새로워 학과 공부에도 재미를 붙였다. 상하이 위육중학교 국제부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유씨는 학교 추천을 받아 톈진 대학 토목건축학과에 입학했다. 중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명문 대학생이 된 것이다. 유씨는 “외국 유학생에게는 대학 입학 특전을 준다. 위육중학교에서 추천서를 잘 써주었고, 중국어 실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합격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유씨는 “유학은 빨리 시작할수록 좋지만, 중국을 우습게 보고 왔다가는 큰코다친다”라고 말했다. 특히 공부보다는 노는 데 더 열성인 아이를 중국에 보냈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돈이면 무엇이든 해결되는 분위기여서, 놀겠다고 마음먹은 아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노래방이나 PC방을 들락거리고, 술과 담배에 끌리기 쉬운 환경인 것은 물론이다. 중국에서는 학교 수위 아저씨에게 몇 천원만 집어주면 성매매를 알선해준다는 소문까지 돈다. ■ 필리핀

학비 싼 징검다리 유학처


중국 못지 않게 조기 유학지로 인기를 끄는 곳이 필리핀이다. 삼성유학넷 김창수 실장은 “해마다 2천~2천5백 명이 필리핀으로 조기 유학을 떠난다. 매일 비행기 네 대가 필리핀으로 떠나는데도 자리가 없을 정도이다”라고 말했다. 3~4 시간이면 오갈 수 있는 영어권 국가인 데다 학비나 생활비가 싸기 때문이다. 특히 국제 학교가 아닌 사립 학교의 상당수는 1년 학비가 5백만원이 채 안된다.

그러나 대부분 사립 학교는 시설이 열악하고(기숙사가 없는 곳이 많다), 필리핀 현지 교과 과정을 따라가기 때문에 정착하려는 유학생들에게는 호감을 얻지 못한다. 시설이나 프로그램이 우수한 국제 학교는 보통 연간 1만~1만5천 달러가 들어 다른 동남아 국가들 못지 않게 비싸다. 그래서 필리핀으로 떠나는 조기 유학생들은 1~2년만 머무르다가 한국으로 돌아오거나 캐나다나 미국 또는 다른 아시아권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필리핀은 일종의 ‘징검다리 유학처’인 것이다. 생활비가 싸서 아예 엄마가 아이를 따라 가서 함께 생활하는 경우가 많다.

박경자씨(서울 행당동)는 중학교 1학년인 아들 김성민군(브랜트 국제 학교 7년)을 지난해 필리핀으로 유학 보냈다. 박씨는 “자식을 유학 보내려면 치밀하게 준비해야겠더라. 필리핀이 좋다는 이야기만 듣고 급하게 보내다 보니 처음에는 시설도 환경도 엉망인 사립 학교에 보내고 말았다”라고 말했다. 김군은 결국 7개월 만에 훨씬 비싼 국제 학교로 옮겼다. 이 학교에서조차 주말에는 기숙사에 머무를 수 없어 1주일에 이틀은 학교에서 나와 홈스테이를 한다.

임은서양(몬티셀로 국제언어사관학교 7년)은 팍팍한 한국 교육이 싫어서 필리핀에서 공부하고 있다. 전체 학생 1백50명 가운데 5분의 1이 한국 학생일 정도로 한국인이 많은 학교이지만 시설이나 교육 프로그램은 호평을 받고 있다. 학교가 관리하는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학급당 학생 수가 7~8명이어서 교사와 학생들의 분위기가 가족적이다. 은서양의 어머니 김미정씨(41·서울 목동)는 “한국에서는 공부에 흥미를 못 붙이고 친구들 관계로 괴로워했는데, 유학 간 뒤로 행복해 하니 보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말레이시아

다민족 문화 저절로 익혀


지난해부터는 말레시아 조기 유학생도 크게 늘고 있다. 유학이야기 김상현 대표는 “현재 말레이시아에 유학한 학생은 1천5백명 가량 되는데, 이 가운데 5백명은 지난해 건너갔다”라고 말했다. 말레이시아는 필리핀이나 중국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중국인이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어 영어와 중국 문화를 동시에 체험할 수 있고, 일찍부터 영국과 미국식 학교 제도를 도입한 우수한 국제 학교가 많다. 무슬림 국가여서 술·담배·마약에 빠질 염려가 적다는 점도 큰 장점 가운데 하나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 2003년 8월에 부모의 권유로 말레시아 조기 유학을 떠난 이효택군(KTJ 8학년). 이군은 한국에서 성적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영어 학원을 운영하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영어도 제법 공부한 뒤에 유학을 떠났다. 덕분에 이군은 두 학년이나 ‘월반’해서 7학년에 편입했다. 2년 공부를 절약한 것이다. 적응 속도도 빠른 편이었다. 그가 다니는 학교는 말레이시아 왕족이 세워 ‘귀족’ 아이들이 다니는 곳이다. 덕분에 말레시아 상류층 문화를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다. 이 학교는 전체 학생 5백명 가운데 한국 학생이 60~70명 있다. 이군은 이곳에서 외국 아이들보다는 오히려 한국 아이들 때문에 힘들어했다. 한국 아이들은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를 ‘왕따’ 놓았고,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한국 형은 이군을 이유 없이 몇 달이나 괴롭혔다. 어머니가 기숙사 사감 선생과 상의한 끝에 방을 옮겨야 했다. 어머니 이민영씨(전북 익산)는 “처음에는 아이가 어려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적응했다. 아이의 성적표를 보면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님들이 아이의 사소한 습관이나 행동 하나하나까지 깨알같이 기록해서 보내준다. 한국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라며 만족스러워했다.

두 아들과 아내를 함께 말레이시아로 보낸 ‘기러기 아빠’ 구자진씨(40·경기도 안양시)도 자신의 선택에 흡족해 하고 있다. 구씨는 “큰 아이가 ‘학교가 재미있다’는 말을 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한국에서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말이다”라고 말했다. 구씨의 아들 본경(세이폴 학교 5년)이 다니는 학교는 세계 100 나라에서 온 아이들이 함께 공부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본경이는 흑인이든 백인이든 가리지 않고 친하게 지내며 다양한 문화를 저절로 익힌다. ■ 인도

요가·명상 체험 이색적


적어도 8~9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야 하는 인도까지 자녀를 유학 보내는 부모도 적지 않다. 인도 조기 유학생은 2003년부터 부쩍 늘어 지난해에는 2백~3백 명이 새로 인도 학교에 들어갔다. 인도유학닷컴 김태균 실장은 “비교적 싸게 영어를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차세대 강국으로 떠오르는 인도를 체험하는 장점 때문이다”라고 분석했다. 요가나 명상처럼 자라는 아이들의 정서에 도움이 되는 독특한 교육 프로그램이 있다는 점 또한 인도 유학의 매력이다.

한국 학생들은 주로 국제 학교나 인도 사립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다. 영국이나 미국식 프로그램을 도입한 국제 학교는 나무랄 데 없는 시설과 환경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학비가 연간 만 달러 안팎이어서 비싼 편이다. 사립 학교는 국제 학교에 비해 학비가 3분의 1이지만 영어로 수업하고 기숙사를 갖추고 있어 한국 학생들이 공부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다만 국제 학교와는 달리 인도식 교육 시스템을 좇고 인도 아이들하고만 접촉할 수밖에 없다.

최서희씨(38·서울 장안동)는 4학년이던 아들 안상우군((TISB 6년)을 2003년에 인도로 보냈다. 최씨는 “영어뿐 아니라 인도 문화의 다양성을 배우게 하고 싶어서 보냈는데 아이가 생각보다 훨씬 잘 적응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방송 일을 하는 부모와 함께 인도와 아프리카를 여행했던 상우는 적응이 빨랐고, 학교에서 인도 친구뿐 아니라 일본 타일랜드 네팔 중국 말레이시아 등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리며 다양한 문화를 자연스럽게 배우고 있다. 이 나라들 외에도 최근에는 싱가포르·몽골·인도네시아로 떠나는 조기 유학생도 늘고 있다. 조금이라도 교육 환경이 나은 곳, 한국 학생이 많지 않은 곳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이런 조기 유학 열풍 덕에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의 많은 나라들은 한국인 학생을 위해 학급 수를 늘리고 교육 프로그램을 바꾸고 있다. 장사로서의 유학뿐 아니라 자국에 호의적인 세력을 기르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48~49쪽 딸린 기사 참조).

그러나 조기 유학을 간다고 해서 누구나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공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지난 한 해 조기 유학을 갔다가 돌아온 학생은 8천명이 넘는다. 이 가운데 20% 정도는 언어나 가정 문제로 유학 생활을 포기하고 돌아온 것이라고 교육인적자원부는 파악한다.

조기 유학은 어린 나무를 옮겨 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린 나무를 잘못 옮기면 말라죽을 수밖에 없다. ‘영어 때문에’ ‘남들 다 하니까’ 보냈던 조기 유학이 자녀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 유학이야기 김상현 대표는 "철저하게 준비해서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낸 뒤에도 세심하게 배려하고 꾸준하게 관심을 가져야만 아이들이 잘 자랄 수 있다" 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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