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기자 양심 선언 “마녀 사냥 있었다”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1999.06.2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황상무 법조팀장 ‘연정희씨 잘못 없다’ 고백… 여권, 언론 개혁 기폭제 삼을 조짐
가뭄 속의 단비라고나 할까? 연속적인 악재로 벼랑 끝에 몰린 국민회의가 최근 호재를 만났다. ‘고가 옷 로비 사건에 대한 언론의 보도 태도가 마녀 사냥이었으며, 김태정 전 법무부장관의 부인 연정희씨는 잘못이 없다’는 한 취재 기자의 양심 선언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KBS 법조팀장인 황상무 기자. 그는 지난 6월7일 사내 컴퓨터 통신망에 ‘ 법조 취재팀에 대한 일련의 비난에 대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옷 로비 사건의 진실을 묻는 동료들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의 이 글에서 그는 ‘옷 사건 수사에 대한 우리나라 언론의 보도는 유감스럽게도 마녀 사냥이었으며, 수사가 끝난 뒤 검찰 기자들이 모여 ‘연정희씨는 잘못이 없다. 진짜 억울할 것이다. 우리가 수도 없이 의혹, 의혹 했지만, 의혹은 별로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라고 밝혔다.

그는 언론이 마녀 사냥을 한 이유를 다섯 가지로 꼽았다. 첫째, 장관 부인들이 옷가게에 몰려다니는 것 자체가 꼴 보기 싫었다. 둘째, 김대중 정부에 대한 반감이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리는 때에 이 사건이 발생했다. 셋째, 법조 비리 파동에도 불구하고 충성심만으로 장관에까지 오른 김태정 개인을 못마땅해 하는 기류가 확산되고 있었다. 넷째, 검사들이 기자를 싫어하듯 기자도 검찰을 몹시 싫어한다. 다섯째, 씹을 것은 일단 씹고 보자는 언론 본연의 콤플렉스가 작용했다.

그는 이어 사건 내용을 날짜 별로 자세히 정리한 후, 연씨가 최소한 법적으로는 무죄임을 주장했다. 요약하면, 연씨는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의 부인 이형자씨를 피하기 위해 무척 노력했고, 호피 무늬 반코트는 이형자씨나 옷 대납 요구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연씨가 검찰 직원을 운전 기사로 너무 자주 쓴 점이나 장관 부인들과 고급 옷가게에 몰려 다닌 점, 조사 과정에서 검찰로부터 지나친 보호를 받은 점 등이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이 글이 실리자 KBS 통신망에서는 곧장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지나치게 연씨 편을 드는 것 아니냐’‘(KBS 검찰 기자들이) 각종 비리에 연루된 KBS 인사들의 혐의를 무마하기 위해 검찰 간부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닌다는 소문이 있다’라는 비판에서부터 ‘사람들이 진실을 진실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연씨가 마녀가 아닐 경우 부풀려 보도한 언론인들은 그 죄를 어떻게 감당하겠느냐’는 옹호성 발언까지 다양했다. 황기자는 ‘그럼 왜 사실 보도를 하지 않았느냐’는 통신상의 질문에 ‘광풍이 몰아칠 때는 기자 개인의 힘으로 어쩔 수 없었다’라고 대답했다.

황기자의 글을 접한 청와대와 국민회의측은 무척 고무되어 있다. 대통령이 민심을 몰라도 너무나 모른다는 불만이 팽배한 터에, 언론계 내부에서부터 여론이 부풀려졌음을 시인하는 ‘고해성사’가 나오자 반박할 여지가 생겼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김대통령은 ‘마녀 사냥’ 발언 이후 민심이 더욱 악화하자 상당한 부담을 느꼈던 것으로 알려진다.호재 만난 국민회의, 적극 활용 예정

국민회의는 이 호재를 적극 활용할 계획이다. 일단 당보에 전문을 게재해 전국에 뿌리기로 했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여권은 이를 언론 개혁의 기폭제로 삼을 조짐이다. 국민회의의 한 고위 인사는 “그동안 언론의 문제점에 대해 많은 지적이 있었지만, 자칫 언론 탄압이라는 누명을 쓸까 봐 자율 개혁만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이번 양심 선언을 계기로 더 강도 높은 언론 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여권의 움직임에 대한 언론계의 반응은 한마디로 ‘걱정된다’이다. 옷 로비 사건에 대한 언론의 보도 태도가 다소 과열되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언론이 ‘없는 민심’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한 중견 언론인은 “언론이 아무리 여론을 부추기려 해도 바닥 민심이 움직이지 않으면 소용없는 법이다. 여권이 행여 한 기자의 개인 고백을 가지고 전체 민심을 재단하려 한다면, 더 큰 오류에 빠지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정치권과 검찰을 강타한 옷 사건의 여파가 언론계로 번질 조짐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