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에서 버림받은 이한영의 삶과 죽음
  • 李政勳 기자 ()
  • 승인 1997.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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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귀공자’의 평양·유학·서울 생활
김정일 생일 바로 전날인 2월15일 경기도 분당의 한 아파트에서 일어난 이한영씨(36) 피격 사건은 충격적이었다. 황장엽 망명 사건과 한보 대출 비리 같은 전대 미문의 대사건이, 이한영씨 피격 사건으로 인해 뉴스 보도에서 2,3선으로 밀리고 말았다. 현재 군·경 합동신문조는 북한 사회문화부 소속 공작원이 이씨를 살해했을 것으로 보고 추적하고 있다.

이씨는 왜 피격되어야 했을까. 북한 최고위층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유학 기간을 포함해 북한에서 21년을 살았고, 이후 15년은 한국에서 전혀 다른 이름으로 생활했다. 피격되기 전에는 분당의 김장현씨(한양대학 선배) 집에서 머물러 왔다. 서울 강남의 한 백화점에 초콜릿 가게를 열었으나 경제적으로는 넉넉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피격된 원인은 굴곡 많은 그의 삶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한영씨의 본명은 리일남이다. 만 17세로 감수성이 예민할 때인 78년 그는 이모 성혜림으로부터 고 이병주의 소설인 <망향>을 받아 난생 처음 남조선 소설을 읽었다. 달콤한 애정 소설을 읽으면서 그는 며칠밤 잠을 설쳤다고 자신의 저서 <대동강 로열 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에서 밝혔다.

소년 리일남은 남조선 영화도 적지 않게 보았다. 이정길과 김지미가 주연한 <육체의 약속>, 신상옥이 메가폰을 잡고 신성일·김지미·오수미가 출연한 <이별>, 신성일과 윤정희의 정사 장면이 나오는 <야행>을 보았다. <미워도 다시 한번>을 감명 깊게 보았고, 라이언 오닐과 알리 맥그로가 주연한 미국 영화 <러브 스토리>가 눈앞에 아른거려 며칠 밤을 뒤척였다고 한다.

성혜랑·성혜림 씨와 누나인 리남옥씨는 남조선의 텔레비전 드라마를 좋아했다. 그 덕에 주석궁에 앉아서 남조선 텔레비전 연속극을 많이 보았다. 백일섭과 여운계가 출연한 <휘청거리는 오후>, 유지인이 나온 <약속의 땅>을 보았고, 정윤희·이경진·임동진·서인석 등이 출연한 <세 자매>는 주제가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한국에 귀순한 뒤 그는 김정일의 아들 정남이가 남조선의 코미디언인 이주일과 구봉서씨를 좋아 해, 여덟 살 때인 79년 이주일을 데려오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고 밝혀 안기부 직원들을 웃기기도 했다. 리일남의 이런 진술은 대통령에게도 전달되어 전두환 대통령이 기자들에게 “우리측 첩보에 따르면 김일성과 김정일이 한국의 텔레비전을 본다”라고 말했다.

주석궁 깊숙한 곳에서 자본주의에 물든 소년 리일남의 꿈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 한번 가보는 것이었다. 이 꿈은 만경대 혁명학원에 재학하던 76년 5월17일 모스크바로 유학가게 되면서 실현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리일남의 숙소는 레닌 대로 바빌로바 가 85번지에 북한이 소유한 아파트로 정해져, 그 곳에서 성혜랑·성혜림 씨 등과 생활하게 되었다.망명 계기된 ‘김정일 아들 사건’

모스크바를 거쳐 유럽 지역에 파견된 북한 공관원들은 성혜림을 찾아와 뇌물을 바치곤 했다. 김정일의 지시로 독일에 파견된 중앙당 부부장 권형록, 싱가포르에서 동남아를 담당하는 백인수 등이 그런 인물이었다. 성혜림에게 상납한 이들은 소년 리일남에게도 5천∼만달러씩 주곤 했다. 이모 성혜림은 권형록에게서 받은 벤츠 450을 리일남에게 주었다. 벤츠를 모는 ‘귀공자’ 리일남 주변에 그를 유혹해 보려는 요인이 많았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리일남씨가 한국에 오게 된 것은, 그의 이종 사촌이자 김정일·성혜림의 아들인 김정남(71년 5월10일생)의 교육 문제가 간접 원인이 되었다. 정남이 교육 문제로 고민한 김정일은 이 철(본명 이수용·현 스위스 주재 북한대사)의 소개로 제네바 국제학교를 선택했다. 제네바 교외 레만 호수 옆 고급 주택가의 빌라를 사서 80년 가을 정남이를 보냈다.

이 학교 입학식 날 외국에서 온 학생들은 각기 자기 나라 국기를 들고 입장한다. 그러나 정남이만 깃발을 들지 않았다. 이때 희한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입학식에 우연히 참석한 스위스 주재 한국대사 노신영씨(전 총리·현 롯데재단 이사장)가 다가가 “어느 나라에서 왔냐”라고 물었다. 만 아홉 살짜리 꼬마 정남이는 “피양서 왔시요”라고 대답했다. 노대사도 놀라고, 정남이를 따라온 수행원도 깜짝 놀랐다. 노대사는 정남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돌아섰다(그후 노대사는 리일남이 귀순했을 때 안기부장으로 있었다).

이 일이 있은 뒤 불안해진 성혜림은 아들의 숙소를 제네바 교외 클로 벨몽의 아파트 4층으로 옮겼다. 그러고도 불안해 82년 봄 정남이를 모스크바로 불러들였다. 이후 김정일은 “일남이가 제네바에 가서 어학 연수를 하고 정남이는 모스크바에 있는 프랑스대사관 학교에 다니라”고 했다. 82년 9월20일께 리일남은 이 철, 식모인 옥선이 아줌마와 함께 스위스 클로 벨몽의 아파트에 여장을 풀었다.

이 철은 리일남을 어학원에 등록시키고 개인 교수를 초빙해 영어와 프랑스어를 배우게 했다. 리일남은 동아출판사 영한사전을 갖고 영어를 공부하며 어학원에 다녔다. 1주일이 지난 9월28일 리일남은 한국대사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누군가가 전화를 받자 “나는 북한 외교관이다. 북한 외교관 여권과 공무원 여권 등 3개나 가지고 있다. 미국 여행을 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겠느냐”라고 물었다. 잠시 후 한국 대사관 직원이 “북한 여권으로 미국에 가려면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라며 있는 곳을 물었다. 3일 후인 10월1일 리일남은 프랑스·벨기에·서독·필리핀을 거쳐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자동차를 타고 시내를 달리는데 길가의 광고판이 눈에 띄었다. 리일남은 순간 “어 이주일이네, 저건 유지인이고”라고 말했다. 동승한 안내자가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남조선 텔레비전을 봐서 안다”라고 하자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고 한다.“돈 쓸 때만 한국에 살아 있음을 느꼈다”

안기부 조사에서 리일남은 초특급 정보를 털어놓았다. 김일성이 거처하는 금수산 의사당(일명 주석궁)과 김일성 등 요인을 경호하는 호위사령부의 구조와 조직에 대해 털어놓았다. 특히 호위사령부에 대한 진술에서 1호위부가 김일성과 주석궁을, 2호위부는 김정일과 중앙당 집무실을 경호한다는 것과, 김일성·김정일이 행차할 때 근접 경호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상세히 진술했다.

‘김일성 부자가 먹는 쌀은 문덕에서만 생산되고, 그들이 마시는 맥주는 용성맥주 공장의 전용 라인에서 생산된다’ ‘김일성이 피우는 담배는 첨성대이고, 김정일은 백두산을 피우다 80년부터 외제인 로스만으로 바꾸었다’ ‘한국 경호실이 대통령을 코드 원이라 하듯 북한 호위사령부는 김일성을 1호 동지라고 한다’ 등 시시콜콜한 것까지 털어놓았다.

‘김정일이 생활하는 15호 관저에서 김정일 집무실까지는 지하도가 연결돼 있다. 관저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백m쯤 내려가면 집무실과 통하는 지하도가 있는데, 너비는 4∼5m고 높이는 3m이며 걸어서 6분 정도 걸린다’는 등 여간해서 알기 힘든 정보도 제공했다. 문세광이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다음해(75년) 일본의 야쿠자 조직이 조총련을 통해 ‘수백만 달러를 주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해주겠다’고 제의해 이를 검토했으나 최종 단계에서 취소되었다는 사실도 알려 주었다.

‘김정일은 성혜림과 사이가 벌어진 뒤 집무실의 타자수인 김영숙과 결혼해 딸 설송을 낳았고 다시 북송 재일 동포 출신인 고영희를 좋아해 81년 둘째 아들 정철을 얻었다’는 것도 밝혔다. 95년 말 모스크바에 있던 어머니 성혜랑씨와의 통화에서는 정철이가 스위스 베른의 국제학교에 다닌다는 정보를 알아내기도 했다.

안기부 조사가 끝날 무렵 리일남에게 ‘한국에서 영원히 살라’는 뜻으로 한영(韓永)이란 이름이 주어졌다. 주민등록번호는 그가 태어난 해(61년)와 그가 스스로 한국 대표부에 온 9월28일을 엮어서 610928로 시작하게 되었다(이씨는 61년 4월 태어났다). 83년 대한민국인 이한영은 특별보상금 1억원을 받아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특별 분양되기로 한 서울 강동구 고덕동의 28평짜리 주공아파트에 입주하는 것이 늦어져 6개월간 잠원동의 18평짜리 한신아파트를 2천만원에 전세로 들었다. 차액 8천만원은 안기부가 정기예금에 넣어두고 매달 70만원 정도씩 이자만 갖다 주었다. 이 중 파출부 몫으로 15만원, 식비로 15만원, 관리비로 10만원을 떼고 나머지 30만원이 그의 용돈이었다. ‘북한 출신 귀공자’ 이한영씨에게 30만원은 너무 적었다.

84년 고덕동 주공아파트로 옮긴 그는 서울 리라국민학교 3학년에 다니다 핀란드로 이민갔다가 단신 귀국한 것으로 위장해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입학할 무렵 바로 앞집에 한양대 교직원인 김장현씨가 이사왔다. 이런 인연으로 두 사람은 매우 가까워졌다. 지난 2월15일 이씨는 분당의 김장현씨 집 현관 앞에서 피격되었다.

한양대에 다니던 84년 그는 스스로를 절제하지 못했다. 자기 집을 담보로 잡고 3백만원을 융자받아 학과 친구들과 술 마시는 데 다 써버렸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안기부 담당관이 그를 단단히 혼냈다. 그러나 이씨는 ‘내 돈 내 맘대로 쓰는데 왜 참견이냐’는 반발심만 생겼다고 저서에 밝혔다. 당시 심정을 그는 ‘남한 사회에서 내가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돈 쓸 때뿐이었다’라고 기술했다.

84년 가을 소외감을 이기지 못한 그는 한바탕 자살 소동을 벌였다. 서울 강남에서 술을 잔뜩 퍼마시고 여관에 들어가 수면제를 먹은 것이다. 그러나 이틀간 잠만 자고 여관을 나왔다. 이틀간 종적이 사라진 것 때문에 그는 안기부 지하실에 불려가 조사받았다. 안기부 사람들은 이씨의 자살 소동은 이씨의 방탕한 생활을 야단치는 자기들에게 시위하기 위한 쇼라고 보았다고 한다.85년 여름 방학 때 그는 안기부의 권유로 서울 명동의 한 성형외과에서 성형 수술을 했다. 그가 얼굴을 바꾸는 사이 안기부는 그의 집을 옮겼다. 그래야만 이씨가 얼굴 바꾼 것을 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가 개강하자 이씨는 교통사고가 나서 얼굴을 수술했다고 적당히 얼버무렸다.

서울 생활 14년간 이씨는 안기부 담당관을 여러 명 만났다. 그러나 몇몇을 제외하고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씨가 워낙 말썽을 많이 피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씨는 저서에서 ‘대부분의 담당관이 귀순자로부터 존경을 받지만, 귀순자를 대하는 기법부터 안되어 있는 사람도 있다’라고 적었다. 그는 존경심도 가지 않는 담당관한테 ‘졸때기’ 대접을 받는 것이 무척 기분 나빴다고 적고 있다.

그가 가장 존경한 담당관은 대학 졸업할 무렵 만난 김 아무개 선생이었다. 이씨는 저서에서 ‘김선생은 형님처럼 내 문제를 걱정해 주었다. 내가 잘못했을 때는 엄중하게 꾸짖기도 했다. 그는 청렴결백한 공무원으로, 그의 태도가 경박하기 짝이 없는 오렌지족인 나를 감동시켰다’라고 적었다.

대학 졸업 직전인 87년 10월 안기부는 이씨를 유럽에서 활동하다 순직한 요원의 자녀로 꾸며 KBS에 취직시켰다. KBS 수습 15기와 동기가 된 그는 국제방송국 러시아어 방송 담당 PD가 되었다. 서울올림픽이 열리자 이씨는 러시아어 전문가로 활약했다.

그해 12월 이씨는 모델 출신인 김 아무개씨와 결혼했다. 결혼 전 그가 신부에게 자기 신분을 솔직히 털어놓았음은 물론이다. 이씨는 안기부 시절 만난 황 아무개씨 부부를 부모로 해 결혼식을 치렀다. 90년 이씨 부부는 딸을 낳았다. 해외 여행이 자유화된 89년 그는 부인과 미국 여행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는 83년 주민등록증을 받은 이래 출국정지자였다. 이에 대해 이씨는 ‘한국에 데려올 때는 자유롭게 미국에 갈 수 있다 해놓고 이렇게 발을 묶어 놓는가’라고 푸념했다고 한다.

89년 그는 KBS 직장 조합주택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이 일로 사업에 눈 뜬 그는 사표를 냈다. ‘인터커넥션’이라는 회사를 차리고 광고 이벤트업과 주택건설업자로 등록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그는 아내와 장인, 처형 그리고 한양대 직원인 김장현씨 등을 임원으로 하고 직원을 4명 고용했다. 첫 사업으로 서울 성수동의 가구공장 터에다 조합주택을 짓기로 하고 매입에 나섰다.정보 팔려고 언론에 등장해 비극 초래

이한영 사장은 그랜저를 사고 서울 반포동에 대지 백평짜리 주택도 구입했다. 그러나 곧 횡령 시비가 일면서 수인으로 전락했다. 2심에서 풀려나와 94년 1년간 그는 안기부가 주는 월 80만원으로 살았다. 그러나 95년 이것마저 중단되자 그는 정보를 팔아보려고 나섰다. 그러다 <월간 조선> 기자를 만나 모스크바에 있는 어머니 성혜랑씨와 통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세상에 알려진 이씨는 신문·잡지뿐만 아니라 방송에도 출연했다. 그러다 지난해 가을부터 무선호출기와 휴대폰 번호를 바꾸고 언론과의 접촉을 피했다. 동시에 서울 강남의 한 백화점에 초콜릿 가게를 내고 재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부인과는 별거 상태였고, 안기부에서는 골치 아픈 존재로 여겨져 보호받지도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한영씨는 이런 생활을 한 끝에 피격되었다. 여기에 황장엽 망명 이후 한국에 간첩이 5만명 있다는 보도가 뒤따라 더욱 어수선한 느낌이다. 따라서 이씨를 저격한 범인을 색출하는 일이 늦어진다면 공안의 찬바람은 그만큼 거세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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