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에 빠진 치과 의사 모녀 살해 사건
  • 성기영 기자 ()
  • 승인 1996.07.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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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 의사 모녀 살해 사건, 영구 미제 될 수도… 초동 수사·검시 제도 개선 시급
지난해 6월12일 발생한 치과 의사 모녀 살해 사건은 영구 미제로 남을 것인가. 피해자의 남편 이도행씨(33)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어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지난 6월26일 무죄 석방되자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제3의 용의자가 나오거나 이씨에게서 여태까지 찾아내지 못했던 직접 증거가 발견되기 어렵다는 점을 검찰측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범행 도구로 지목된 커튼 끈은 행방이 묘연하고, 피해자의 왼쪽 손가락에서 발견된 극미량의 혈흔은 분석 가능한 수준 이하였다. 게다가 불탄 현장은 소방대의 진화 작업으로 인해 극심하게 훼손되었고, 시체는 욕조에 담겨 모든 지문이 지워진 상태였다. 교살 사건에서 주로 발견되는 그 흔한 반항 흔적마저도 없었다.

검찰측과 변호인측은 피해자의 사망 시각이 이도행씨의 출근 시각이었던 사건 당일 오전 7시 이전이냐 이후냐를 입증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법의학 지식을 총동원해 사망 시각 논쟁을 벌인 것이다.

가장 큰 쟁점이 되었던 것은 피해자의 몸에 나타난 시반(屍斑)의 소실 여부였다. 시반은 심장 박동이 멈춘 뒤 일정한 시간이 흘러 시체 아래 쪽에 형성되는 죽음의 흔적이다. 시반이 사건 당일 오전 시체의 대퇴부와 가슴·어깨 등 곳곳에서 목격되었다는 것이 시체를 최초 검안한 관계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그러나 사건 다음날인 6월13일 오전에 부검을 실시할 때는 대퇴부 쪽의 시반만 있고 나머지 시반은 모두 소실되었다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권일훈 박사는 법정에서 증언했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이 시반을 이동성 시반, 즉 사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이 응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생긴 시반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시반이 고정되는 시간을 영국 법의학자 카이스 만트의 견해대로 최하 4시간부터라고 본다면, 결국 이 시체의 사망 시각은 시체를 최초 검안한 11시30분에서 4시간 이내, 즉 7시30분 이후가 된다.

 
현행 검시 제도, 검시의가 부검 사진 보고 판단


시강(시체의 강직 상태)을 기준으로 사망 시간을 추정한다 하더라도 오전 7시 이전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재판부의 결론이다. 법정 진술을 한 법의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번 사건의 시체와 같이 손가락 마디까지 전신 강직이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2시간에서 13시간까지로, 이 역시 시체의 상태에 따라 일정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시체가 발견된 욕조에 담긴 물의 온도에 따라 강직 진행 속도가 달라질 수 있어, 이 사건의 경우 시강을 기초로 하여 사망 시간을 정확히 추정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라는 지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보다 사망 시간을 추정하는 데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위의 내용물에 의한 방법이다. 1심 판결에서는 시체의 위에 존재했던 내용물을 기초로 해, 이 음식이 사건 전날인 6월11일 밤에 먹은 저녁 식사 내용물이라고 판단하고, 사망 시각을 늦어도 6월12일 오전 2시 이전으로 추정했었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시체의 위에서 발견된 미역 등 내용물이 반드시 전날 저녁에 먹은 것이라고 단정할 근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같은 사실들은 앞으로도 유사한 사건에서 법의학적 소견과 형사 판결 사이에 적지 않은 갈등이 존재하리라는 사실을 예고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황적준 교수(고려대·법의학)는 이와 관련해 “법의학자들은 법의학 교과서에 나와 있는 사실만을 진술할 뿐이다. 사망 시각을 정확하게 알아내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없다”라고 말해 그 한계를 인정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초동 수사 단계에서 법의학자들이 참여하지도 못한 채 부검 사진만을 놓고 판단해야 하는 지금과 같은 검시 제도에서는 이같은 상황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물론 검시 단계에서 법의학자들이 참여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법의학적 견해와 판결의 간극을 줄이려면 현행 검시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는 데는 검찰·변호인·법의학자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대검 강력부는 92년 애인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던 김기웅 순경이 진범이 잡힘으로써 1년이 넘는 억울한 옥살이 끝에 풀려난 후 <김기웅 사건을 계기로 본 강력 사건의 수사상 문제점과 대책>이라는 ‘반성문’을 펴낸 적이 있다. 여기서 검찰은 ‘검시의가 직접 시체를 확인하지 않은 채 경찰의 검증 내용을 그대로 믿는 검시 결과서를 작성한 데서 이 사건이 오판되었다’라고 진단한 바 있다. ‘현장 감식 소홀’을 이 사건의 가장 중요한 오류로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경우는 다르지만 그 과오가 이번 사건에서 정확히 재연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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