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위법은 무죄, 축재만 유죄?
  • 石琮顯 (단국대 교수·법학) ()
  • 승인 1996.0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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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국정연설 ‘준법 불감증’ 엿보여…‘헌금 수수’ 적법성 입증해야
최근 언론의 보도 태도를 보면, 이 나라에는 정치만 있고 법은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물론 이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 헌정사를 돌이켜 보면 정치만능주의가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치만능주의가 판을 치는 국가에서는 정치가 법보다 우선됨으로써, 법을 경시하는 풍조가 일반적인 현상으로 자리잡는다. 이 경우 법치는 형식적 법치가 되며, 법은 지배 계층의 권력 행사를 정당화시켜 주는 도구로 전락한다.

김대통령은 1월9일 국정 연설에서 자신도 과거에 후원자들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시인하면서도, 축재를 위해서는 한푼도 받거나 쓰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후원자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고 시인하는 것은 곧 김대통령과 정치권 모두 정치 헌금 관행에 관련돼 있음을 긍정한 것이다.

정치 헌금 관행이 지닌 문제의 본질은 개인적 축재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관행 자체가 준법인지 위법인지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김대통령은 그 점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정치 헌금이 실정법에 위배되는 불법 자금이라면, 그 돈을 받는 순간에 이미 범죄 행위가 성립된다. 그 이후에 정치적으로 사용했건, 개인적으로 축재했건 간에 그것은 법적으로는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김대통령은 정치 헌금을 개인적인 축재를 위해 받거나 쓰지 않았음을 강조할 필요가 없으며, 반대로 자신이 받은 정치 헌금이 모두 적법했음을 강조하고 입증해야만 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법의 권위를 빌려 통치권과 행정권을 행사하는 지위에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국정 연설에 담긴 논리에 따르면, 노태우씨가 처벌되는 것은 축재를 했기 때문이며, 만일 축재를 하지 않고 모두 정치 자금으로 사용했다면 아무런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대통령의 국정 연설은 바로 이 나라의 정책·규범·질서의 근본 방향을 정하는 것으로, 국민의 경제·사회·정치 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와 같은 국정 연설에서 대통령이 불법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불법에 대한 인식 결여를 드러내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 나라의 법은 정치권에 적용되는 법과 국민에 적용되는 법으로 이원화돼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이 나라 정치권의 불법 불감증은 심각한 중증에 빠져 있음을 의미하므로,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국민이 위법 불감증에 빠진 정치권이 만든 법을 준수해야 하고 법의 권위에 복종해야 하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한 개인이 은행을 털어 형법 제333조 ‘강도의 죄’를 범했다면, 검찰은 시효 만료로 공소권이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반드시 그를 강도죄로 기소하여야만 한다. 이때 강도가 강탈한 돈을 불쌍한 사람을 돕는 데 쓰고 자신의 이익이나 향락을 위해 한푼도 쓰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은행 강도의 행위가 적법했다고 인정해야 하는가.

누구를 위한 정치인가. 헌법 제7조는 공무원이 국민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도덕성과 정당성을 상실한 정치는 국민에 대해 어떤 책임을 지고 있는가.

전국구 국회의원 정수를 늘리고 선거구 협상을 하는 것이 국민을 위하는 정치인가. 이 점에 대해 우리 정치인들은 반성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그런 정치를 허용하고 방관하는 국민도 반성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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