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 만들어내는 여론조사?
  • 成耆英 기자 ()
  • 승인 1999.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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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정 장관 퇴진 관련 청와대 여론조사 결과, 언론사와 큰 차이… “설문 자체가 난센스”
같은 사안에 대한 의견을 묻는 두 가지 여론조사에서, 그 결과가 한쪽에서는 57%로, 다른 쪽에서는 16%로 나왔다면 분명 둘 중 하나는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다.

검찰이 고급 옷 로비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기 며칠 전 청와대가 월드 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성인 남녀 천 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김태정 법무부장관의 거취는 검찰 수사가 밝힐 사건의 진상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응답이 57.1%가 나왔다.

검찰이 김장관 부인 연정희씨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한 날 오후 이번에는 <중앙일보>가 똑같은 전화 인터뷰 방식으로 김장관 퇴진 관련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이 조사 결과는 월드 리서치의 것과 전혀 딴판이었다. ‘부인이 무혐의 처리됐으므로 물러날 필요없다’고 답한 사람은 15.9%에 불과했다. 오히려‘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는 의견이 74%로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이 두 가지 조사 결과를 논리적으로만 따지자면‘김장관 퇴진 여부는 검찰 수사가 밝힐 사건의 진상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데 찬성한 57%의 국민들은 검찰 수사 결과 사건의 진상이 ‘연정희 무죄’로 드러났으므로 ‘물러날 필요없다’고 응답해야 한다. 그러나 정작 ‘무혐의 처리되었으므로 물러날 필요없다’는 응답은 15.9%이고 이보다 훨씬 많은 74%의 국민이 ‘물러나야 한다’고 대답한 것이다.

“유임 기정 사실화하기 위한 기획”의혹

다른 언론사가 실시한 여론조사 역시 청와대 여론조사와는 동떨어진 결과를 보여주었다. <한겨레>가 인터넷을 통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김장관을 경질하거나 자진 사퇴시켜야 한다는 응답은 86%, 소프레스 글로벌 리서치가 실시한 <문화일보> 여론조사에서도 ‘김장관이 물러나야 한다’는 응답은 57.5%를 기록했다.

왜 이처럼 상반된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을까.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월드 리서치가 실시한 여론조사의 질문은 내용 설계부터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10여초 남짓한 짧은 시간에 설문 내용을 듣고 답변해야 하는 전화 여론조사의 경우 질문 내용에 어떤 형태로든 전제가 깔려 있으면 응답자들은 그 방향으로 의견이 기울게 마련이라는 것이 여론조사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그런데 청와대가 의뢰한 월드 리서치 여론조사 설문에는 ‘검찰 수사가 밝힐 사건의 진상에 따라’라는 장황한 전제가 붙어 있다. 당연히 응답자들은 그런 전제에 의지하려는 심리를 갖게 된다. 전형적인 유도성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설문 항목을 검토한 여론조사 전문 기관 미디어 리서치의 한 연구원은 질문 자체가 난센스라고 평가했다.

이 연구원은 “김장관 퇴진 여부처럼 의견이 엇갈릴 수밖에 없는 현안에서는 찬성과 반대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질문을 던질 때에만 공정한 여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라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김장관 퇴진’과 ‘김장관 유임’처럼 상반되는 설문을 읽어 주고 찬성이냐 반대냐는 식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론조사 결과는 질문의 내용은 물론 토씨 하나에도 커다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전화 여론조사의 경우 질문의 순서를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서도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청와대가 이렇게 무리한 여론조사를 진행하고 이를 공개했을까. 우선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실(수석비서 김한길)이 이번 조사를 의뢰한 것부터가 이례적이다. 청와대는 그동안 긴급 현안 관련 여론조사는 국가정보원에 맡겨 왔다. 그러나 이번 조사는 김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한 사이 청와대가 직접 주도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이번 김장관 퇴진 관련 여론조사는 대통령이 귀국하기 전 사전 정지 작업을 해, 김장관 유임을 기정 사실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 아니냐는 의혹을 사고 있다.

결국 이번 청와대 여론조사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여론 조작’논란을 안고 출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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