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틀어쥐더니 생각 달라졌네
  • 吳民秀기자 ()
  • 승인 1999.0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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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 안기부 대공 수사권 확대 추진...야당 때와 정반대
96년 12월31일. 당시 야당이던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와 자민련 김종필 총재는 결연한 표정으로 거리 투쟁에 나섰다. 이미 두 야당 총재는 ‘반독재 투쟁 공동위원회’를 결성한 터였다. 12월26일 새벽 신한국당에 의해 단독 처리된 노동법 및 안기부법 개정안이 ‘원천 무효’임을 알리는 시위였다. 두 야당 총재는 특별히 제작한 당보를 뿌렸다.

당시 신한국당이 새벽에 날치기 통과시킨 법안은 11개. 이 중 여야가 의견 차이를 보이며 사활을 걸고 싸운 법안은, 노동법과 안기부법. 당시 개정된 안기부법의 요체는 대공 수사권 부활이었다. 93년 김영삼 대통령이 개혁 깃발 아래 안기부의 대공 수사권을 대폭 축소했는데, 막상 정권을 운용하다 보니 새삼 안기부의 대공 수사권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당시 여권은 간첩 깐수 사건과 연세대 한총련 사태 등 ‘국가 안보 위기’를 안기부 대공 수사권을 강화하는 논리로 적극 활용했다.

따라서 간첩 수사권만 가졌던 당시 안기부는, 날치기 통과를 계기로 불고지죄·북한 고무찬양죄 등에 대한 수사권을 검찰과 경찰로부터 ‘되찾아갈’ 수 있었다. 정권 초기의 개혁 기조에 밀려 납작 엎드려 있던 안기부가 다시 명실 상부한 권력 기관으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물론 국민회의는 법안 통과 자체가 ‘원천 무효’라며 결사 반대했다. 다음은 안기부법 개정을 전후해 당시 국민회의 지도부와 의원 들이 쏟아낸 말이다.

“안기부법 처리를 원천 무효화하고 국민 화합을 통한 안보 태세 강화에 주력해야 한다.”(천용택 의원의 대정부 질의) “안기부 수사권 확대는 간첩을 잡는 목적이 아니라 폭압 정치 회귀의 신호탄이다.”(야당 공동 주최 토론회에서 천정배 의원) “안기부법 개정 목적은 대선에 악용하려는 것이다.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지식인·학생 등 민주주의를 원하는 사람을 공포에 빠뜨려 여당이 원하는 대선으로 몰고 가려는 것이다.”(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날치기 안기부법은 4천5백만 국민의 사상의 자유와 언론 출판의 자유를 짓밟는 반인권적 악법이다.”(정동영 의원의 대변인 성명)

이종찬 부장 “국정 전반의 정보 수집 필요”

국민회의가 이처럼 안기부의 대공 수사권 확대를 격렬히 반대한 이유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대통령 선거 때문이었다. 공작 정치의 악몽은 야당 시절 늘 DJ를 짓누르던 공포였다. 그래서 국민회의의 안기부 공격은 97년 내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안기부법 무효 투쟁은 국회에서, 거리에서, 선거전 와중에서 아무 때고 튀어나왔다. 심지어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헌법재판소에 국회의장을 상대로 한 권한 쟁의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에 헌법재판소는 안기부법 재개정 결정을 내렸으나, 대선 회오리에 휩싸인 국회는 재개정 공방전으로 끝냈다.

야당 시절 국민회의가 ‘폭압 정치’의 상징으로 지목했던, 확대된 안기부의 대공 수사권은 현정부에서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국회 본관 529호실 사건으로 불거진 정치 사찰 공방 와중에서 이종찬 안기부장은 “96년 당시 국회 통과 과정에서 절차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불고지죄·찬양고무죄에 대한 안기부의 대공 수사권은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헌법재판소의 재개정 결정까지 끌어내며 집요하게 반대했던 안기부의 대공 수사권 확대를, 막상 자기들이 집권하자 정보기관에 ‘필요한 무기’라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화장실에 갈 때와 나올 때 심정이 다르기는 다른 모양이다.

이종찬 부장은 최근 안기부법 개정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피력하기도 했다. 물론 이부장이 거론한 안기부법 개정 방향은 과거 자기들이 그토록 강력히 주장해 온 대공 수사권 축소가 아니라, 국정 전반의 정보를 수집할 수 있도록 법 규정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이는 정치 사찰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안기부의 정치 정보 수집 행위를 앞으로는 아예 합법적으로 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이부장은 이러한 논리의 근거로 정치권의 대공 취약점이나 보안 누설 등을 거론하고 있다. 이른바 보안 정보 수집을 빌미로 정치권 동향을 항상 체크하겠다는 얘기이다. 불과 2년 만에 입장이 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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