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안으로 떠오른 선거구제 개편
  • 文正宇 기자 ()
  • 승인 1995.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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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자당 의원 40여 명, 제도 개편 추진… 야당 ‘일사불란 반대’ 어려워 현실화 가능성
민자당이 선거를 앞두고 또 선거법 개정을 들먹인다. 지방 선거 전 행정구역 개편 문제를 들고 나왔던 민자당이 이번에는 총선 선거구제 개편을 얘기한다. 선거법 가운데 현실에 맞지 않는 조문 몇개를 고치는 수준이 아니다. 매번 선거판 자체를 뒤바꿀 만한 근본적인 문제를 들고 나온다. 민자당이 문제를 제기하는 순서도 언제나 비슷하다.

이번에도 중·대 선거구제를 본격적으로 공론화한 사람은 이춘구 대표였다. 그는 6·27 선거가 끝난 직후 열린 임시국회 정당 대표 연설에서 현행 소선거구제를 개편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방 선거 전 열린 임시국회에서도 행정구역 개편 당위성을 역설했다.

공교롭게 이번에도 이대표의 말을 이어받아 실무적인 총대를 멘 사람은 민주계인 송천영 정책조정위원장이다. 그는 현재의 소선거구제를 중·대 선거구제로 개편하는 선거법안을 정기국회에 제출하기 위해 소속 당 의원들로부터 서명을 받고 있다. 송위원장은 지방 선거를 불과 석달쯤 남겨놓았던 지난 3월에도 행정구역 개편을 위한 초·재선 의원들의 서명작업을 주도한 바 있다. 그는 당시 행정구역 개편이 안되면 선거를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민자당의 사정도 송의원이 지난번 행정구역 개편을 주장할 때와 비슷하다. 당시 정부·여당은 잇단 대형 사고로 신뢰가 땅에 떨어져 지방 선거에서 승리를 점치기 어려웠다. 현재도 여당의 참패로 끝난 지방 선거 결과는 내년 4월로 예정돼 있는 총선에서 민자당이 고전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을 예고하는 상황이다. 선거구제 개편을 추진하면서 송의원이 내세우는 명분도 지난번 행정구역 개편 때 주장했던 내용과 크게 보면 다를 것이 없다. 현재의 선거구제는 장기적인 국가 발전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청와대에 선거구제 개편 보고서 올라갔다”

그러고 보면 송의원이 주도하는 선거구제 개편 문제가 일과성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지난번 행정구역 개편 때처럼 여야가 극한 대결로 치달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행정구역 개편을 추진할 때는 그것을 밀어붙이는 힘이 청와대에서 나온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됐었다. 민주당은 뉴질랜드 한국대사관 직원인 최승진씨가 폭로한 외교 문서를 근거로 하여 청와대가 선거를 연기하려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현재 청와대가 선거구제 개편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대통령 자문기구인 정책기획위원회(전 21세기위원회)가 최근 김대통령에게 ‘현재의 정당 제도 및 선거구 제도는 개혁 정책을 추진하는 데 장애가 된다’는 대외비 보고서를 올렸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을 뿐이다.

현재 송의원이 주도하는 서명 작업에 참여한 민자당 의원은 40명 남짓이다. 송의원은 서명 작업이 끝난 17일 당 지도부에 정기국회 중에 선거구제 개편을 당론화하자는 건의서를 올렸다. 그는 “지방 선거 결과 낙선을 우려한 충청·서울·대구·경북 일부 의원이 중·대 선거구제를 추진한다고 하는데, 서명 의원 가운데는 안전권에 있다는 부산·경남 의원들도 끼여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중·대 선거구제를 추진하는 이유는 대략 세 가지로 정리된다. 우선 현행 소선거구제에서는 국회의원이 도저히 중앙 정치에 몰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앙에서 원내 활동을 아무리 잘해도 지역의 초상집과 결혼식장에 쫓아다니지 않으면 단박 선거에서 낙선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얘기이다. 현행 소선거구제를 그대로 유지할 경우 지역 분할이 민족 정서로 고착될 수 있다는 말도 한다. 이번 지방 선거 결과가 그것을 잘 웅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장관급인 국회의원의 자존심도 내세운다. 2급 공무원인 광역시 구청장이나 시장은 1명 뽑는데 같은 지역에서 국회의원은 3~4명 뽑기 때문에 국회의원의 권위가 말씀이 아니게 구겨졌다는 얘기이다. 송의원은 선거구제 개편이 국회의원을 한번 더 하고 안하고 문제가 아니라 구국 차원의 문제라고 재삼 재사 강조한다.

하지만 그들의 얘기를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선거구제 개편을 추진하는 주류는 지방 선거 결과 총선에서 당선을 기약하기 어려운 인사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선거구제가 고쳐지지 않으면 총선에서 민자당 간판을 달고 나갈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민자당 지도부가 이 문제에 대해 아직 인식이 통일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최근 전형적인 게리맨더링이라고 여론의 지탄을 받는 선거구 개편에 민자당이 동의한 것만 보아도 아직 당 지도부가 이 문제에 대해 방향을 설정하지 못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중·대 선거구제로 개편할 생각이 있으면 굳이 여론의 비판을 받으면서 야당과 머리를 맞대고 선거구를 잘게 쪼개는 작업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자민련은 중·대 선거구제 찬성?

김윤환 총장은 오래 전부터 중·대 선거구제로 개편하자고 주장해 왔지만 당장 정기국회에서 법안을 고쳐 15대 총선 때부터 실시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입장이다. 야당의 저항이 거셀 것이 뻔한데, 게임의 룰을 정하는 선거법을 고치면서 야당을 무시하고 일을 추진하면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도 원론적으로는 찬성하는 입장이다.

민자당이 선거구제 개편을 추진하기 가장 어려운 요인으로 지적됐던 ‘야당의 저항력’에 최근 이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 선거구제 개편 추진론자들에게는 청신호이다. 현재 민주당은 김대중 이사장의 신당 창당으로 사분오열된 상태이다. 게다가 자민련이라는 새로운 변수도 등장했다. 자민련은 선거구제 개편이 반드시 자기 당에 불리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중·대 선거구제가 자민련이 전국 정당으로 발돋움할 기회를 가져다줄지 모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민련 관계자 중에서는 “민자당이나 김대중 신당에 비해 지역적으로 고른 지지 기반을 갖고 있어 중·대 선거구제로 바꾸는 것을 심각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아무튼 민자당이 밀어붙일 경우 현재 야권은 지난번 행정구역 개편 때처럼 일사불란하게 대처할 힘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그 때문에 여권 내에서는 처음에는 현실성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선거구제 개편론이 야당의 분열로 말미암아 김대통령이 쓸 수 있는 정국 돌파용 카드로서 점차 무게를 더해 가고 있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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