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에 '12월 정치대란설' 파다
  • 崔 進 기자 ()
  • 승인 1995.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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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자·민주·정개련 ‘12월 합당’ 가능성…청와대·민주계, 정계 개편에 적극적
‘김대중 신당’이 불쑥 솟아오르던 지난 7월말께 이기택 총재 부인 이경의씨는 신당행이냐 민주당 잔류냐로 고민하던 몇몇 의원의 부인들을 조용히 불러 옷소매를 끌어당겼다. “만년 야당만 할 겁니까. 조금만 기다립시다. 우리도 곧 여당 할 때가 옵니다.”

북아현동의 ‘안방 정치’가 주효했는지 갈팡질팡하던 몇몇 의원이 민주당 잔류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구당파측이 흘린 그같은 얘기가 사실인지, 의도적인 선전인지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정치권의 많은 사람이 ‘야당이 곧 여당 할 때’를 오는 12월께로 잡고 있다. 여야가 뒤섞이리만큼 거대한 정치 지형 변화가 연말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금년 12월은 14대 국회 종료, 민자당 조직책 공천, 민주당 전당대회가 한꺼번에 겹쳐 대단히 미묘한 때이고 격랑이 일 소지가 많은 시점이다.

이기택은 결단을 내릴 것인가

거기다 최근 정가에는 ‘KT의 12월 결단설’까지 나돌고 있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이기택계의 한 중진 의원은 “연말이면 여야 울타리가 허물어질 정도의 큰 변화가 반드시 오리라고 믿는다.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한데 뭉쳐야 한다. YS가 정치판을 새로 짜는 결단을 내릴 것으로 본다. 너무 민감하고 폭발성이 큰 사안이어서 그만 얘기하겠다”며 정계 개편을 시사했다. 물론 이기택 진영의 몇 가지 징후만을 놓고 정계 개편을 그려 본다는 것은 현 시점에서 무리가 많다.총선이나 대선 때만 되면 유령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정계개편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청와대와 민자당의 집권 실세 그룹, 그리고 민주당과 자민련 지도부의 상당수가 거의 비슷한 관점에서 12월 정계개편설에 고개를 끄덕인다면 문제는 다르다. 무엇보다 정계 개편의 열쇠를 쥔 청와대나 민주계 중심 세력들이 ‘이대로는 안된다’며 총선 전에 현재의 정치 구도를 재편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청와대의 한 민주계 고위 인사는 “예산 국회가 끝나는 12월2일부터 연말까지 정치권을 뒤흔들 변수가 수없이 많다. 상임위와 국감 기간에 잠복해 있던 정치 변수들이 연말이면 한꺼번에 튀어나올 것이다”라고 말한다. 대통령의 의중을 잘 아는 민자당 민주계의 한 다선 의원도 “12월에 어떤 형태로든 정치 구조에 큰 변화가 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만 말하겠다”고 귀띔하면서 “변수는 민주당과 정개련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김대통령이 12월에 새로운 판짜기를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민주계 핵심 인사들은, 현재의 여권 진용으로 총선에 출전할 경우 6·27 지방 선거에 이어 또다시 DJ의 새정치국민회의에 완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첫 번째로 들었다. 경쟁력을 상실한 구여권 터주대감들을 그대로 총선까지 끌고갈 경우 승부가 뻔하다는 것이 민주계 진영의 공통된 위기 의식이다. 실제로 다음 총선에서 민자당이 이긴다고 장담할 수 있는 지역은 별로 없다. 부산·경남까지 흔들린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다.

그런 점에서 지난 9월19일 인선된 민자당 조직책은 앞으로 이루어질 공천의 파격성을 충분히 예측케 한다. 강삼재 총장은 “부여에 육참총장 출신을, 부산에 현직에서 막 옷을 벗은 검찰총장을 심을 줄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번 조직책 인선은 김대통령이 공천의 첫째 기준으로 제시한 ‘당선 가능성’이 결코 현역 의원을 우대하겠다는 뜻이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청와대나 민주계의 기류를 보면, 현역 의원 물갈이 폭은 예상 밖으로 커질 가능성이 높다. 김윤환 대표는 9월20일 기자간담회에서 민자당 현역 의원 탈락률이 역대 선거 때의 25~30%보다 약간 적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민주계 핵심 인사들은 40% 넘게, 또는 그 이상으로 잡았다. 김대통령이나 민주계 지도부는 겉으로는 ‘당선 가능성을 중시한다’는 말로 현역 의원들을 안심시키면서 뒤돌아서서는 ‘현역 의원 치고 당선 가능성이 높은 사람 별로 없다’며 물갈이 칼을 갈고 있는 모습이다. 정가에는 민자당이 12월 초 예산 국회가 끝날 때까지 현역 의원들을 다독거리다가 회기가 끝나자마자 물갈이 칼을 휘두를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공천에서 탈락한 현역 의원 상당수가 다른 정당으로 옮겨 가거나 무소속으로 출마하리라는 점에서 현역 의원의 교체 폭은 정치판을 변화시키는 주요 동인이다.

김대통령이 총선 전에 정치판을 다시 짜리라는 또 다른 근거로 청와대의 한 고위 인사는 대통령의 정국 돌파 스타일을 들었다. “양김씨의 승부는 매번 DJ가 먼저 잽을 몇번 날리면 YS는 기다렸다가 일발 필도의 반격을 가하는 식이었다. YS의 승부 근성으로 볼 때, 6·27 선거에서 한 방 맞은 YS는 총선에서 KO 펀치를 날릴 기회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야는 12월에 큰 변화가 오리라는 시나리오에는 대체로 공감하면서도 구체적인 청사진을 그리는 데는 다소 주저한다. 이기택 고문을 둘러싼 개편 시나리오는, 여권이 이고문 진영만을 끌어들여 과연 어떤 실익을 챙길 수 있겠느냐는 측면에서 한계성을 지닌다는 지적이다. 그보다는 민주당 구당파가 정치개혁시민연합 및 젊은연대모임 등과 함께 반3김 세력을 결성한 뒤 민자당내 개혁 진영과 손을 잡는다는 시나리오가 정치권에 훨씬 더 널리 퍼지면서 여권 핵심부의 입맛을 돋우고 있다. 정개련의 핵심 인사 상당수가 친YS 성향이라는 점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민주당의 몇몇 인사는 “YS가 새 집을 짓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개혁 세력을 하나로 엮는다면 다음 대선 때 DJ는 꼼짝 못하게 포위될 것이다. 문제는 YS에게 그만한 결단력이 있느냐이다”라고 말해 여권이 새 판을 짤 경우 참여할 수 있다는 뜻을 비쳤다. 민자당·민주당·정개련은 세대 교체에 관한 한 연합군이다. 최근 들어 세대교체론이나 3김 청산론은 상황에 따라 반DJ 연합 공세의 주무기로 사용되는 측면도 없지 않다.

‘정계 개편 불가론’도 만만찮아

한편 자민련은 다소 색다른 관점에서 12월에 정계가 개편되리라고 점쳤다. 자민련 한영수 총무가 그려본 그림에 따르면, 정개련은 민주당과 통합하더라도 보수 성향의 김원기 진영보다는 진보 성향의 이부영·노무현 의원 쪽과 손잡을 여지가 더 많다. 민주당이 만약 12월 전당대회에서 둘로 쪼개질 경우 진보 그룹은 여권내 개혁 그룹과 제휴하고 이기택계나 나머지 구당파 인사들은 국민회의 또는 자민련 쪽으로 각각 흡수될 것이다. 한마디로 정치판이 보수 대 진보 진영으로 양분된다는 시나리오이다. 한총무는 “정계 개편은 이미 진행되고 있으며 12월에 마무리될 것이다”라고 매우 단정적으로 말했다.

물론 12월 정계개편설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내년 4월 총선 이후라면 몰라도 그 이전에 과연 어느 정파가 정치 생명과 직결된 위험수를 두겠느냐는 것이다. 민자당만 하더라도 보수 세력을 끌어안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판국에 총선을 겨우 4개월 앞두고 개혁 깃발로 승부를 거는 모험을 감행하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민정계 최재욱 조직위원장은 “총선 전에는 으레 준(準)정계 개편 상황이 오기 마련이다.민주당이나 정개련이 민자당에 들어와 얻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라고 개편설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민주당 이 철 총무도 “민주당의 사전에 여와 야가 하나로 합치는 정치 구도는 설정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여야 불문하고 정치판에 뭔가 변화가 오리라는 조짐은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9월 중순 불쑥 튀어나온 정주영 신당설에서부터 지난 9월18일 국회 본회의에서 국민회의 소속 최락도 의원 석방안을 처리하면서 나타난 민자당의 이탈표, 같은 날 이세기 서울시지부장이 주재한 민자당 서울지역 의원 10명의 시위성 모임에 이르기까지 여권 분열 조짐은 여기저기서 감지되고 있다.

민주당도 심상치 않다. 김원기 고문의 구당파가 통합과 개혁을 위한 모임이라는 독자 그룹을 만들자 이기택계도 9월18일 정통민주연합을 만들어 맞섰다. 양 진영에는 팽팽한 긴장감마저 감돈다. 구당파 진영에서는 벌써부터 “만약 이기택 고문이 12월 전당대회 때 다시 당권을 잡으면 민주당은 두 쪽으로 갈라질 가능성이 높다”는 엄포성 발언이 흘러나오는 형편이다.

민주당은 정개련과 젊은연대를 중심으로 하는 반3김 연합 전선 구축 작업을 차근차근 진행해 나가고 있지만, 내부 균열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정계 개편이 어렵다고 보는 사람들은 “민주당이나 정개련이 뭣하러 인기 없는 민자당과 손을 잡으려 하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개편론자들은 “민자당은 자기네가 인기가 없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외부 정치 세력을 끌어들이는 데 더욱 적극적일 수 있다. 관건은 김대통령의 결단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단 1%의 가능성을 100%의 현실로 이끌어내는 ‘승부사 YS’라면 얼마든지 ‘12월 대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국민 정서를 무시한 인위적인 정계 개편이 이루어질 경우 자칫 ‘제2의 3당 합당’이라는 거센 비판에 직면할지 모른다는 점에서 여권의 정치적 부담은 크다. 여권이 먼저 나서고 싶어도 나설 수 없는 속사정이 여기에 있다. 이래저래 12월은 정치적으로 어느 때보다 ‘위험한 계절’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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