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P·MRP도 꿰어야 보배
  • 李哲鉉 기자 ()
  • 승인 1999.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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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경영 관리 시스템 도입 붐… 준비 안된 기업 ‘줄줄이’실패
한국 기업에 전사적 자원 관리(ERP)와 제조 생산 관리(MRP) 열풍이 일고 있다. 전사적 자원 관리와 제조 생산 관리는 회계·생산·제조·인사 같은 기업 업무를 일괄 관리하는 컴퓨터 시스템이다. 세계 유수 경영 컨설팅 업체들은 한국 경제가 위기를 맞은 원인으로 기업의 경영 효율과 생산성이 크게 떨어진 것을 꼽는다. 컨설팅 업체들은 생산성과 경영 효율을 높이려면 이러한 관리 체제를 도입하라고 한국 기업에 충고한다. 정부도 이를 도입한 기업에 우선 대출해 주라는 지침을 발표했다.

요즘 대기업에 이어 중소기업도 생소하기 그지없는 새로운 경영 관리 시스템을 도입하느라 열심이다. 하지만 전사적 자원 관리와 제조 생산 관리 시스템 활용에 성공하는 업체보다 실패하는 업체가 많다. 특히 인원과 관리 비용이 적은 중소기업 가운데 실패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은 경영자·관리자·사용자가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한 채 실무에 적용하기 때문이다. 정보화 수준이 높지 않다 보니 짧은 시간 안에 시스템을 이해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철저한 교육을 통해서 전산화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도 직원들이 떠나버리면 그동안 들였던 공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중소기업은 이직률이 높아 담당자가 자주 바뀐다. 따라서 숙련된 관리자가 없어 시스템 관리에 애로를 느끼다가 고작 재무 회계 부문에나 사용할 뿐이다.

그룹웨어 생산 업체인 피코소프트는 올해 들어 우수 중소기업에 그룹웨어를 무상으로 깔아 주는 행사를 펼치면서 기업 전산화 수준을 살폈다. 이 행사를 주관한 오창훈 컨설턴트는 올해 초 방문한 한 전자 부품 업체를 잊지 못한다. 경기도 성남에 있는 ㅅ전자는 천만원이나 드는 그룹웨어를 무료로 깔아 준다고 해도 난색을 표했다. 이 회사는 이미 쓰라린 실패를 맛보았기 때문에 전산화라면 치를 떨었다. 지난해 중순 전사적 자원 관리 체제를 도입했다가 낭패를 본 것이다.

종업원 2백30명이 일하는 이 회사는 오랫동안 사내 전산화 교육을 한 뒤 이를 도입했는데, 도입하자마자 회계·제조 부문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고 회사 업무는 큰 혼란에 빠졌다. 이 회사는 결국 거액을 들여 마련한 이 시스템을 사용하지 못하고 처박아두고 있다. 피코소프트 이윤규 상무는 “ㅅ전자 같은 회사가 비일비재하다. 보고받은 것만 10개 업체가 넘는다”라고 말했다. 전사적 자원 관리 시스템을 도입하는 데 드는 막대한 비용을 감안하면 회사로서는 큰 손실이다.

기업 정보 시스템이 성공적으로 정착하려면 몇 가지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우선 사용자가 재미있게 활용하고 관리자가 무리 없이 관리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어야 한다. 성공한 업체들을 살펴보면, 그룹웨어나 인트라넷을 먼저 도입해 정보화 마인드와 환경을 갖추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룹웨어나 인트라넷을 사용하면서 회사 구성원들이 의사 소통과 정보 교환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을 때 데이터와 문서를 통합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개별적으로 구성된 이 시스템을 나중에 경영정보시스템(MIS)으로 통합한 업체들은 최고 경영자에서부터 말단 직원까지 전사적 자원 관리와 제조 생산 관리 시스템을 별 탈 없이 이용하고 있다.

정부, 현실 모른 채 “무조건 ERP 도입하라”

피코소프트는 순차적으로 시스템을 도입해 기업 정보화에 성공한 기업으로 단석산업을 꼽는다. 컴퓨터 모니터 부품을 생산하는 이 업체는, 그룹웨어와 인트라넷을 순차적으로 시행한 뒤 전사적 자원 관리 체제를 도입했다. 사장과 시스템 관리 임원이 스스로 전사적 자원 관리 체제를 적극 이용했고, 종업원들에게 전사적 자원 관리 체제를 활용하라고 독려한 것이 성공 요인이다.

한국 경제가 다시 위기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기업의 경영 효율과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드물다. 그 방법이 기업 정보화이다. 따라서 전사적 자원 관리나 제조 생산 관리 시스템 도입은 필수이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시스템을 무조건 도입하라고 강요하기보다는 기업의 정보화 마인드와 환경을 키우는 작업을 먼저 진행해야 한다. “기업 정보화를 몇 단계로 나누어 순차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피코소프트 김규엽 본부장의 지적이다.

자금력과 전문 인력이 절대 부족한 중소기업은 단계 별로 접근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전사적 자원 관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조건 제조 생산 관리 도입을 부추기는 정부 정책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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