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기술 앞세운 ‘벤처 기업가 6총사’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1997.0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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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 미디어·정보통신 분야 주도
앞으로 5년. 보통 21세기를 맞이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21세기가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다가가는 이들이 있다. 아니 첨단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조하면서 21세기를 앞당기고 있다. 바로 정보통신 혁명이라는 복음을 주창하며 벤처 기업을 창업한 30대 사장들이 그 주인공이다. 벤처 기업가들은 대부분 대기업이 보유하지 못한 첨단 기술을 가지고 고부가가치 제품을 만들어 낸다. 이들은 정보통신 분야에서 성장 신화를 만들며 21세기 한국 경제를 책임지겠다고 나서고 있다.

벤처 기업이 성공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첨단 기술이다. 정보통신산업에서는 차별성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벤처 기업이 하루도 견뎌내기 힘들다. 대신 세계 유수 기업과 경쟁해서 뒤지지 않을 제품이 있으면 하루아침에 떼돈을 버는 분야가 정보통신산업이다.

디지털 멀티 미디어 가전업체인 건인은 이 분야에서 돈을 많이 번 기업 가운데 하나이다. 89년 자본금 5천만원이던 이 회사는 96년에 2백억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했다. 95년 매출액은 1백20억원이었다. 경기 침체로 여기저기서 쓰러지는 업체가 수두룩한데 건인은 매년 거의 100% 가까이 성장했다. 97년 5백억원, 98년 천억원을 매출 목표로 잡을 만큼 기업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건인의 성장은 정보통신 업계에서 신화가 되었다.

건인의 성장 비결은 세계 수준의 멀티 미디어 기술이다. 변대규 사장은 디지털 가전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회로를 설계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건인은 96년 중반에 디지털 위성 방송 송수신기(set-top box)를 아시아에서 처음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건인이 95년부터 G프로젝트라는 암호명으로 비밀리에 개발한 디지털 위성 방송 송수신기는 기존 위성 송수신기에 주문형 비디오 시스템(VOD)를 연결할 수 있고 동화상·음성 같은 디지털 정보 교환 기능까지 보유하고 있다. 건인은 지난해 9월부터 이 제품을 유럽 통신 장비 유통업체 갤럭시사를 통해 유럽 시장에 수출하고 있다. 이 제품의 96년 수출액은 백억원이고, 97년 목표액은 2백억원이다.

핸디소프트사도 96년 11월22일 일본 금속회사 아마다 그룹과 1억5천만달러(약 1천2백60억원)짜리 통합 물류·생산·지원 시스템(CALS)용 그룹웨어(사내외 컴퓨터를 하나로 연결해 정보 교환의 효율화·화상 회의·전자 우편·전자 결제 등을 가능하게 하는 프로그램을 패키지 형태로 제공하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공급 계약을 맺어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95년 국내 기업들의 소프트웨어 수출 총액은 고작 2천7백만달러(약 2백27억원)였다. 96년 매출액 2백40억원, 직원 1백40명에 불과한 벤처 기업이 국내 소프트웨어 수출 총액의 5배(96년 통계는 아직 나오지 않았음)가 훨씬 넘는 계약을 맺었으니 핸디소프트의 기술력에 놀랄 만하다. 연구에 총력 집중, 제작은 외부 맡겨

아마다 그룹은 자사와 세계에 퍼져 있는 2만여 협력 업체를 하나로 연결하는 그룹웨어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세계 유명 제품을 비교 평가했다. 그 가운데 성능과 가격 경쟁력에서 핸디소프트의 제품이 최고라는 결론을 내렸다. 일본 정보컨설팅 회사 야마이치 정보시스템사가 실시한 세계 7대 그룹웨어 제품을 비교 평가한 자료에 따르면, 핸디소프트의 ‘핸디오피스’가 종합 2위를 차지했다. 지금까지 국내 최고라고 알려진 핸디소프트의 기술력을 이제 세계가 인정하게 된 것이다.

벤처 기업의 활약은 단순히 첨단 제품을 수출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외국 유명 업체가 국내 시장을 잠식하는 것을 막아 상당한 액수의 수입 대체 효과도 거두고 있다. 퓨처시스템 김광태 사장은, 노터스사의 노츠(Notes)가 미국을 비롯해 전세계 그룹 통신웨어 시장을 석권했어도 한국 시장에서 아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퓨처시스템이 생산하는 퓨처/TCP 때문이라고 말한다. 퓨처/TCP는 TCP/IP 제품으로 국내에서만 15만 카피가 팔려나가 대략 30만명이 사용하고 있다. TCP/IP는 업계 표준 통신 규약(통신 프로토콜)에 맞게 컴퓨터 간의 정보 전달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화상 회의·전자 우편 등 컴퓨터 통신이 제공하는 대다수 서비스를 구동하는 프로그램의 집합체이다. 이 업체는 이미 퓨처/TCP를 중국 시장에 수출하고 있다.

가장 뚜렷하게 수입 대체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은 터보테크이다. 터보테크는 공작 기계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인 컴퓨터수치제어(CNC)와 컴퓨터를 이용한 디자인(CAD)·공정(CAM) 분야의 첨단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터보테크의 사업 분야는 메카트로닉스(메카닉스와 일렉트로닉스의 합성어)이다. 이 기술은 자동차·우주 항공·방위·반도체 제품을 만드는 자본재를 생산하는 분야이다. 일본에서 개념이 형성된 메카트로닉스는 기계·전자·신소재·컴퓨터 관련 기술을 융합하여 종합적으로 이용하는 기술이다.

전세계 메카트로닉스 시장은 일본의 파넉(FANUC)사가 50%를 점유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일본 파넉의 협력 업체인 한국 파넉이 국내 컴퓨터 수치제어 컨트롤러 시장의 90%를 점유하고 있다. 그 결과 연간 천억원의 외화가 유출된다. 수입 유발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수입 유발 효과란 수출이 늘어날수록 수입도 덩달아 커지는 효과를 말한다. 예컨대 한국은 세계 최대 메모리 반도체 수출국이고 세계 5위의 자동차 생산국이지만, 이들 제품을 생산하는 자본재를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해서 쓰기 때문에, 수출을 많이 해도 그만큼 수입이 따라서 늘어나게 된다. 보통 환율이 높아지면 수출이 늘고 수입이 줄어 무역 수지 개선 효과가 있다. 하지만 국내 경제 구조는 그렇지 않다. 자본재를 지나치게 외국에서 수입해 쓰기 때문이다. 결국 힘들여 수출해 벌어들인 외화가 자본재 생산국으로 고스란히 유출되는 셈이다.

게다가 만일 비상 사태가 발생하여 파넉사가 한국에 수출을 중단한다면 한국의 주력 산업이 초토화할 것은 눈에 보듯 뻔하다. 장흥순 터보테크 사장은 국내 산업이 아직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했다고 말할 정도이다. 그래서 장사장은 컴퓨터 수치제어 상품을 개발하는 데 주력해 컴퓨터 수치제어 컨트롤러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장사장은 88년 터보테크를 창업하자마자 일본 파넉이 장악한 국내 공작 기계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해 현재 10%를 차지했다. 터보테크는 매년 140%씩 성장하여 96년 매출은 2백20억원에 이른다.

터보테크는 컴퓨터 수치제어 인덱스 컨트롤러 생산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이 제품은 세계 공작 기계 시장의 70%를 점유한 일본도 88년에야 개발에 성공했을 정도로 첨단 기술이 요구된다. 터보테크는 이제 기술 자립 수준을 넘어서 세계 수준의 기술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벤처 기업은 대기업보다 한 발짝 빨리 시장을 선점하고, 시장이 성숙하게 되면 재빨리 다른 시장을 개척하면서 성장하는 것이 보통이다. 한번 재미 본 시장에 안주하는 기업은 후속 주자에게 추월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형성된 시장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첨단 기술 제품을 생산·판매하여 새로운 시장을 창출한다. 종합 멀티 미디어 업체를 꿈꾸는 두인전자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두인전자 김광수 사장은 멀티 미디어라는 용어가 생소하던 92년 개인용 컴퓨터에 쓰이는 텔레비전 수신 보드인 PC비전을 개발하여 국내에 처음으로 멀티 미디어 개념을 도입했다. 컴퓨터로 영화를 보면서 캡션 자막으로 영어를 공부할 수 있고 마음에 드는 장면을 따로 모아 편집할 수 있는 길을 연 셈이다. 이후 두인전자는 고성능 그래픽 카드, 멀티 미디어 통합 카드 같은 다양한 첨단 멀티 미디어 제품을 계속 출시하고 있다.

멀티 미디어 시장에 한 발짝 먼저 들어선 덕택에 두인전자는 눈부시게 성장했다. 90년 8월 자본금 5천만원으로 창업하여 매출액이 94년 48억원, 95년 1백76억원, 96년 4백억원으로 초고속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이제 두인전자는 세계 최고 영상카드 업체인 미국 시그마디자인사의 릴매직에 필적하는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두인전자 김사장은 멀티 미디어 분야에서 두인전자가 세계 제일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한다. 95년 12월에는 과학기술처장관이 주는 벤처 기업 대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두인전자는 직원 1백40명 가운데 20%가 연구 인력이다. 자체 생산 공장은 없다. 김사장은 기술 혁신 속도가 빠르고 제품의 생명 주기가 짧은 정보통신산업에서 고정 비용을 많이 들여 생산 라인을 구축하는 것은 손해라고 본다. 대신 외주 방식을 택한다. 5천만원짜리 55만원으로 가격 파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벤처 기업이 있는가 하면 이미 형성된 시장에 기술 혁신을 일으켜 제품 단가를 파격으로 줄여 성공을 거두는 기업도 있다. 건인은 92년 대당 3천만~5천만원에 수입하던 디지털 영상 가요 반주 시스템, 즉 노래방 기계를 국산화하여 대당 55만원에 시장에 내놓았다. 건인은 이 제품으로 국내 노래방 기기 시장의 90%를 장악했다. 건인이 92년 매출액 50억원을 기록하면서 튼튼하게 자리를 잡은 것도 노래방 기기 덕이다. 그 이후 멀티 미디어 쪽으로 사업 방향을 바꿔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주문형 반도체 회로 설계 회사 C&S는 기존 무선 호출기에 들어가는 네 가지 칩을 하나로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호출기 사업은 제조 단가가 1센트만 내려도 수익률 개선 효과를 나타내는데 C&S는 호출기 개당 생산 단가를 7달러(약 5천9백원)에서 5달러(4천2백원)로 줄였다. 게다가 호출기 크기를 5백원짜리 동전 크기로 줄일 수 있다. 따라서 시계·브로치·필기구 같은 다양한 디자인과 성능을 자랑하는 무선호출기를 출시하게 된다.

C&S는 한국통신에 이어 시내 전화사업을 하는 회사가 시내 전화 서비스를 개시할 때 반드시 필요한 기술인 무선가입자망(WLL) 관련 기술을 개발해 놓았다. 제2 시내전화 사업자가 올해 선정되면 C&S는 또 한번 비약하는 계기를 만난다. 96년 매출액이 백억원인 C&S가 97년도 매출 목표액을 4백억원으로 잡는 것도 머지 않아 단일 칩이 내장된 호출기와 무선가입자망 제품이 출시되기 때문이다. C&S 서승모 사장은 이미 메모리 반도체 회로 설계의 권위자로 알려졌다. 그는 삼성전자에 근무할 때 1메가D램과 4메가D램을 개발한 주역이다.

서사장은, C&S가 세계 최초로 코드분할 다중접속 방식(CDMA) 기술을 실현한 미국 퀄컴사와 견줄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C&S는 삼성전자가 생산하는 주문형 반도체 회로의 절반 가량을 설계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그 대가로 이 회사를 주문형 반도체 디자인하우스로 지정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C&S는 이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차세대 제품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세계 최고라고 자부하는 반도체 회로 설계 기술로 모든 종류의 이동통신 칩을 생산할 계획이다. 그 첫 단계로 영상 전화기(비디오 폰) 칩을 개발하고 있다. 이 제품은 일반 전화기에 카메라와 액정 표시 화면을 장착해 가정이나 사무실에서 상대방을 보면서 전화 통화를 가능하게 한다. 또 일반 전화선을 통해 화상 회의가 실현된다. 영상 전화기의 핵심 기술은 데이터 압축 기술이다. C&S는 이미 세계 수준의 데이터 압축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이 사업은 상당한 수익률이 보장될 것으로 보여 6개 기업이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공동 개발하고 있다. C&S는 이 제품을 97년 하반기에 출시할 예정이다.벤처 산업이 21세기 한국 경제 주도

2000년 통신 시장 규모는 지금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무한대에 가깝다. 초고속 정보 통신망이 구축되면 모니터 하나로 텔레비전·컴퓨터·통신 단말기를 대신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2000년에는 누가 통신 분야의 핵심 기술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사업의 승패가 좌우된다. 고품질 영상 통신 기술은 지금도 끊임없이 발전한다. 서사장은 C&S를 미래 통신 수단에 들어가는 모든 반도체 회로를 설계하는 세계 최대 반도체 회로 설계 전문 회사로 키우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

차세대 제품을 개발하려는 노력은 벤처 기업의 생존술이다. 퓨처시스템이 차세대 네트워크 방식인, 모든 정보를 동시에 보내고 받게 할 수 있는 비동기(非動機) 전송모드(ATM) 사업에 진출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통신 표준 규약이 마련되지 않아 상용화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통신 규약 자체가 양방향이고 서비스 질이 우수하기 때문에 화상 회의나 주문형 비디오 시스템 같은 서비스에 최적이다. 퓨처시스템은 한국전자통신연구소와 비동기 전송모드 관련 기술 이전 계약을 맺었다. 지난 6월에는 삼성물산과 삼성건설에 비동기 전송모드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퓨처시스템이 또 하나 차세대 제품으로 개발하고 있는 것은 보안 프로그램이다. 통신이 발달할수록 통신 보안 문제는 심각한 주제로 떠오른다. 이에 맞춰 컴퓨터에 들어 있는 유틸리티마다 보안이 가능한 보안 프로그램을 설계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두인전자 김광수 사장은 차세대 기억 매체인 디지털 비디오 디스크(DVD)를 주력 제품으로 삼았다. 두인전자의 대표 상품으로 자리잡은 멀티 미디어 컴퓨터용 영상 보드와 동화상 압축 표준 규격(MPEG) 보드를 계속 생산하면서 DVD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DVD는 CD와 LD를 대체할 새로운 기록매체로 CD 7장, 플로피 디스크 3천2백장 정도의 용량을 가지고 있다. 두인전자는 세계 최초로 개인용 컴퓨터에 쓰이는 ‘DVD비전’을 개발하여 시판에 나섰다. 이 제품은 디지털 시대를 여는 신호탄으로 알려져 있다. 변대규 사장은 건인을 코드분할 다중접속 방식의 개인휴대통신(PCS) 단말기를 생산하는 업체로 만들겠다고 말한다. 개인휴대통신은 사업자가 선정되어 98년부터 서비스가 시작된다. 서승모 사장은 개인휴대통신 단말기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리라 예상한다.

벤처 기업은 다양한 분야에서 시작하지만 2000년 목표는 종합 멀티 미디어 회사나 통신 전문업체 같은 정보통신 분야로 집결한다. 정보통신산업이 21세기 주력 산업으로 알려져 있는 만큼 벤처 기업가가 앞으로 한국의 산업을 주도해 나갈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고민이 있다.

정보통신산업은 숙명적으로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정보통신산업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별이 새로 뜨고 진다. 최첨단 기술도 몇 달만 지나면 낡은 기술이 되는 기술의 발전 속도와 숨 쉴 틈 없이 변해가는 고객의 취향을 감안한다면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래서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벤처 기업가들은 새해를 맞이할 여유도 없이 연구실과 사무실을 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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