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기금 2033년에 고갈된다
  • 張榮熙 기자 ()
  • 승인 1995.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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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줄 급여 많아 2033년 완전 고갈 예상…6공 정부 정치적 선심 탓
이탈리아 국민의 8분의 1이 94년 10월 거리로 뛰쳐나왔다. 성난 이들은 3월 자신들의 손으로 뽑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를 연일 성토하며 연금 개혁안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95년도 예산안에서 연금 개시 연령을 높이고 수혜 폭을 줄이는 것을 골자로 한 개혁안을 만들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치솟던 인기가 급전직하했다.

94년 이탈리아의 연금 적자는 무려 85조리라(42조5천억원)에 달했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개혁안을 통해 연금 적자를 9조리라 가량 감축하려 했지만 이것이 엄청난 저항을 불렀다. 이탈리아 정부로서는 연금 적자를 대폭 줄이지 않으면 더 이상 정부를 유지할 수조차 없는 지경에 몰려 있었다. 베를루스코니 정부를 위기로 몰아넣은 연금 문제는 과거 이 나라 정치 세력들이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도 인기에 연연해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아온 데 있다.

2000년이면 전국민 가입

이탈리아의 노령 연금과 비슷한 한국의 국민 연금도 안전 지대에 놓여 있지는 않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88년에 실시한 국민 연금은 그 골격이 바뀌지 않을 경우 2022년께 총지출이 총수입을 넘어선다. 불과 30여년 만에 적자 상태가 되는 것으로, 적자 발생은 필연적으로 기금 고갈을 예고한다. 그동안 차곡차곡 쌓인 적립 기금이 줄어드는 분기점이 되기 때문이다. 적립 기금은 2023년에 최대치에 도달했다가 급속히 감소하기 시작해 2033년에 완전 고갈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같은 재정 수지 전망(90년 불변가격 기준)은 실질 이자율을 95년 6%에서 2050년 3.5%로 예측했고, 임금 상승률은 5.5%에서 3% 수준으로 떨어지며, 물가 상승률은 4%에서 2%대로 떨어진다고 가정했다. 이 경제 변수들의 움직임에 따라 적자 발생과 기금 고갈 시기가 당겨지거나 늦추어질 수 있다. 가입자와 수급자 수를 추계하는 정확도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나 이 언저리에서 기금 재정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국민 연금이 시작된 지 불과 40여년 만에 위기 상황을 맞을 것으로 예측되는 가장 큰 이유는, 연금 가입자가 낼 돈보다 받을 돈이 지나치게 많기 때문이다. 한국개발연구원 문형표 연구위원은 “장기적으로 본 국민 연금 재정의 취약성은 보험료 수준에 비해 너무 많은 급여 혜택을 주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구조적 수급 불균형을 시정하지 않으면 고갈될 위기를 피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국민 연금은 의료보험과 함께 사회보장 체계의 중심적 구실을 하고 있다. 노후대비 저축과 개인 연금 등의 개인 보장, 퇴직금 같은 기업 보장과 함께 노후 생계를 위한 ‘3층 보장 체계’의 근간이다. 5인 이상 사업장의 근로자는 강제로 연금을 들어야 한다(당연 적용 대상). 지난 7월부터는 농어민도 국민 연금에 가입했으며 마지막 소외 지대인 도시 자영업자도 2000년까지는 국민 연금의 소속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금세기가 가기 전에 국민 연금은 그야말로 전국민을 망라하는 사회 보험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국민 연금은 이미 기금이 고갈된 군인 연금과 고갈 시기가 2004년께로 추정되는 공무원 연금이 초래했거나 야기할 파문에 비할 바가 아니다(71쪽 상자 기사 참조). 국민 연금은 어느 특정 세대나 계층이 아닌 국가 백년 대계를 위한 핵심적 사회보장 제도이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로부터 연금 관리와 운용 책임을 위임 받고 있는 국민연금관리공단은 95년 6월 말 현재 5백55만 가입자로부터 11조8천9백억원(5월 말 현재)을 갹출했다. 보험료는 국고 보조 없이(농어민에 한해 최저 소득 등급 보험료의 3분의 1을 정액으로 지원) 가입자가 모두 부담하는 기여 원칙을 따르고 있다. 사업장 가입자의 경우 사용자와 근로자가 분담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총고용 비용’이라는 점에서 보면 전액 근로자 부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보험료는 표준 소득 월액의 3%에서 출발해 현재 6%(98년 이후 9%)이다. 공단은 이 돈을 금융시장과 공공 부문에서 굴려 기금 적립액을 13조1천4백억원(6월 말 현재)으로 불려 놓았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설계부터 잘못된‘불량 보험 상품’

공단에 의하면, 국민 연금이 적립 방식(다른 하나는 부과 방식)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당분간은 빠른 속도로 기금이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문제는 2차대전 이후인 45년부터 60년대 초까지 태어난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가 만 60세가 되어 연금 수혜자가 되면서부터다. 연금 적자 시기인 2020년께는 이들이 집중적으로 연금을 타기 시작해 기금이 바닥날 때와 거의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빠르게 진전되고 있는 인구의 노령화도 연금 재정을 더욱 압박하는 요인이다. 게다가 인구 증가율 둔화에 따라 총가입자(사업장 및 지역 가입자) 수도 2030년께 1천1백20만명 수준을 고비로 하여 점점 줄어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연금을 탈 사람은 많고 연금을 부을 사람은 줄어든다는 얘기다.

한국개발연구원의 추계 모형에 따르면, 총수입(갹출금+운용 수입)은 가입자 수와 소득이 늘어나 90년 불변 가격 기준으로 2020년 38조원, 2030년 44조원, 2040년 52조원 등으로 크게 늘어난다. 그러나 총지출( 노령 연금+유족 연금+장해 연금+반환 일시금)은 이보다 더욱 큰 폭으로 늘어나게 되어 있다. 이에 따라 2030년께 총수입에서 총지출을 뺀 수지 차(적자)는 31조원이 되며, 2040년께에는 두배가 넘어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국민 연금은 한마디로 잘못 설계된 보험 상품이다. 사회 보장 전문가들은 애초부터 불량품이었다는 근거로 두 가지 잣대를 들고 있다. 우선 연금 구조를 분석하는 데 가장 주요한 지표로 쓰이는 ‘내부 수익률’이다. 내부 수익률이란 가입자가 총가입 기간 동안 부은 보험료의 현재 가치와 퇴직 이후 받게 되는 기대 연금 급여의 현재 가치를 같게 하는 연평균 실질 이자율을 말한다. 내부 수익률과 기금의 운용 수익률이 거의 일치한다면 재정 상태가 견실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보험료의 3배까지 지급

국민 연금의 내부 수익률은 가입 기간에 따라 평균 8.08%에서 13.93%로 분석되고 있다. 가령 가입 기간이 15년으로 88년 당시 45세이던 가입자에게 차질 없이 연금을 주려면 수익률이 13.93%가 되어야 한다. 배우자 혜택을 포함할 경우 내부 수익률은 8.60%∼14.48%로 더욱 높아진다. 미국 사회보장 제도(Social Security)의 내부 수익률은 국민 연금보다 훨씬 낮다. 25세 당시의 소득이 3만달러인 경우 내부 수익률이 도입 초기(1915년 출생자)는 5.46%, 도입 후기(1960 출생자)는 1.54%에 그치고 있다.

구조적인 재정 취약성은 보험료와 급여의 현재 가치를 비교하는 방식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보험료와 급여의 현재 가치를 가입자 퇴직 시점을 기준으로 환산해 보면 보험료의 2∼3배(배우자 혜택 포함)나 되는 돈을 급여로 받아가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국민 연금은 금융시장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고금리 금융 상품인 것이다. 많이 받을 수 있으면 그것처럼 바람직한 것이 없겠지만 ‘수원’은 무한하지 않다. 바닥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혜택이 지나친 점 외에도 고소득층일수록 수혜의 절대액이 많은 점도 공적 부조의 원칙에서 보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절대 빈곤층에 대한 공적 부조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연금 재정에 기여한 것보다 2∼3배나 많이 받아가는 것이 기금 고갈의 가장 큰 원인이라면, 해결책은 혜택을 대폭 깎아내거나 보험료를 올리는 수밖에 없다. 우선 보험료를 올리는 방법이다. 국민 연금 전문가들에 따르면 보험료가 소득 월액의 20%쯤 되어야 균형점을 찾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것은 현실 가능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소득의 20%라는 살인적 수준을 버텨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또 보험료를 계속 올릴 경우 초기 세대에 비해 후기 세대의 부담이 무거워진다는 점도 바람직하지 않다. 아버지 세대의 부담을 아들 세대에 전가하는 셈이어서 세대간 형평성 측면에서 부도덕한 일이다.

보험료 인상이 효과적이 못된다면 급여 수준을 대폭 줄일 수밖에 없다. 현행 급여 수준이 선진국의 공적 연금제도에 비해 결코 낮지 않다는 점에서도 이 대안은 타당성이 있다. 우선 수급 자격 조건을 까다롭게 하는 방법이 있다. 연금을 처음 주는 연령을 높이고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기간을 늘리는 것이다. 현재 60세(갱내 광부·어로사업 종사자 등 특수 직종 근로자는 55세)인 개시 연령을 최소 65세로 높이는 것을 검토할 만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은퇴 시기가 연장되고 평균 수명이 늘고 있다는 추세를 고려하면 그리 나쁜 선택이 아니다. 사회복지 비용 급증에 따른 재정 수지 악화를 막기 위해 미국·독일·프랑스· 스웨덴은 개시 연령을 이미 65세로 높였으며 일본은 2010년에 상향 조정할 계획이다. 개시 연령을 65세로 높일 경우 연금 수지 개선에 상당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러나 개시 연령을 높이는 것만으로는 재정 취약성을 방어하는 데 역부족이다. 내부 수익률이 실질 이자율 전망치에 비해 여전히 높게 나타나고 있다. 개시 연령 상향 조정과 함께 급여 산식을 바꿔 혜택을 줄이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커진다.

급여 산식을 조정하는 일은 시기 선택이 중요하다. 연금 지급이 본격화한 때, 가령 2010년 이후에 시도한다면 가입자 및 연금을 수령하고 있는 사람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것이 분명하다. 연금이 정권을 뒤흔드는 위기로 비화하는 것을 외국의 예에서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대 간의 형평성에도 문제가 적지 않다. 문형표 연구위원은 “연금의 구조적 문제점을 수술하는 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지적했다.

이밖에 반환일시금 제도나 소득 추계 제도가 불충분한 점도 연금 재정 구조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반환일시금 제도는 15년 미만의 가입자가 불가피하게 중도에 탈퇴할 경우 그동안 낸 보험료와 이자를 후하게 쳐서 돌려주는 제도이다. 전문가들은 실직·재해 등으로 보험료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면 이 기간 동안 내지 않도록 하다가 다시 가입시키는 제도로 전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한다.

정부“고갈 위기 심각하지 않다”

소득추계 제도를 강화하는 것도 홍수에 대비해 제방을 튼튼히 하는 일일 수 있다. 현재도 재직자 노령 연금 제도를 통해 이를 부분적으로 도입하고 있기는 하다. 60세가 넘어서도 기본 연금액 이상의 소득이 있는 업무에 재직할 경우 65세까지 연금액의 일부를 삭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득 규모가 아니라 연령(60∼64세)에 따라 기본 연금액의 50∼90%를 주고 있기 때문에 충분하지 않다. 이를 소득 수준과 연동해 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

국민 연금 제도는 한번 적자의 늪에 빠지면 당장 해일로 돌변할 가공할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가입자가 많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적자를 메울 묘수가 없기 때문이다. 당장은 군인 연금처럼 국가가 이 구멍을 메우려 들 것이다. 그러나 재정 수지 전망에 의하면 2030년에 적자 폭은 31조원이나 되고 2040년은 67조, 2050년에는 84조원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나라 살림 전체를 연금을 메우는 데 쓸 수는 없을 뿐더러 이것이 가능하지도 않다.

국민 연금을 책임지고 있는 보건복지부의 한 관계자는 “연금 고갈 위기론은 한 연구원의 문제 제기일 뿐이다”라고 일축했다. 그동안 간헐적으로 제기된 수많은 연구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현재 어떠한 대책도 강구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기금 고갈을 막을 최선의 방책은 수혜 폭을 줄이는 것이다. 정부로서는 인기가 뚝뚝 떨어질 일이니 엄두를 못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계가 기금 고갈을 향해 계속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독일 통일 후 통일 비용의 약 80%가 사회보장 관련 지출로 쓰인 옛 서독의 경우를 볼 때, 통일 이후를 대비한 국민 연금의 재정견실도는 더욱 중요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6공 정부의 후한 약속은 다음 정권에 큰 부담을 지워 놓았다. 국민 연금의 재정 부실은 철저한 정치 논리로 생겨났다. 국민 연금은 고통스럽지만 경제 논리로 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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