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의 안식처가 된 '조세피난처'
  • 소종섭 기자 (kumkang@e-sisa.co.kr)
  • 승인 2001.1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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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없는 나라' 악용한 불법 외환거래 급증…
올 10월 현재 적발 금액 1조3천2백억
지난 6월 중순. 대기업 계열사인 ㄱ사는 뜻밖의 손님들을 맞았다. 관세청 외환조사과 직원들이었다. 관세청은 이미 이 업체가 1천6백억원대의 위장 무역 거래를 했다는 첩보를 입수한 상태였다. 외환조사과 직원들이 돈을 해외로 빼돌렸는지를 집중적으로 조사한 뒤 ㄱ사는 검찰에 고발되었다.


이 회사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때 긴박한 상황에서 해외 법인 간에 자금을 불법적으로 지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ㄱ사의 한 관계자는 법을 위반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고 항변했다.




또 다른 대기업 계열사인 ㅅ사도 올 1월에 관세청 조사를 받았고, 지난 2월 2백억원대 불법 외환 거래를 한 혐의로 검찰에 고발되었다. 수출입 과정에서 일부 자금이 사라진 혐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ㅅ사 관계자는 좋은 일도 아닌데 이제 와서 말하고 싶지 않다며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를 거부했다.


이들 두 기업은 조세피난처(세금이 아예 없거나 명목상의 세금만을 유지하는 국가나 지역)와 관련되어 불법으로 외환 거래를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처럼 IMF 사태 이후 조세피난처에 투자하거나 거래하는 우리나라 기업이 급증했는데, 최근 들어 불법 외환 거래로 적발되는 기업들도 늘어나고 있어 관계 당국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대표적인 조세피난처는 라부안·바하마·몰디브·버진아일랜드·도미니카·케이맨 군도·버뮤다 등이다.


IMF 사태 이후 기업들의 조세피난처 진출은 봇물이 터졌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이다. 1999년 6월 말 조세피난처에 진출한 기업은 8백40여 개였는데 2000년 말에는 1천2백여 개, 올 들어서는 1천7백여 개로 증가했다. 투자금액도 1999년 6월 말 20억 달러에서 지난해 말에는 48억 달러로 늘어났다. 그러자 관세청이 올 들어 10월 말까지 적발한 불법 외환 거래 2조2천5백억원 가운데 67%인 1조3천2백억원이 조세피난처와의 거래에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와 비교해 328%나 늘어난 수치여서 흐름이 예사롭지 않다.


기업들이 조세피난처로 앞다투어 진출하는 이유는 자금 조달 등에 대한 규제가 거의 없어 감독 당국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고 세금 부담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IMF 사태 이후 외환 거래가 자유화한 틈을 타 이 지역을 무대로 불법 외환 거래가 기승을 부리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금감원 직원들 최근 '조세피난처 출장' 잦아


그동안 재계 주변에서는 일부 국내 기업이 주로 말레이시아 라부안과 아일랜드 지역을 이용해 자금을 빼돌린 뒤 외국인 자금으로 둔갑시켜 국내로 들여오고 있다는 소문이 많았다. 일명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고 불리는 외화 자금이다. 국내 기업이 전환사채(CB)를 발행한 후 이를 제3자인 해외 금융기관을 통해 자신이 설립한 조세피난처 내 역외 펀드가 인수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 증권가 주변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국내에 들어온 조세피난처 자금은 1999년의 경우, 외국인 직접 투자액 중 0.6%인 9천2백만 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난해는 33배나 늘어난 30억7천만 달러에 달했고, 올 5월까지 지난해와 맞먹는 30억3천만 달러가 들어오는 등 날로 늘어나는 추세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금융감독원(금감원)이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금감원 외환감독국 직원들은 11월 말부터 12월 말까지 직원 6명이 여러 차례에 걸쳐 라부안과 영국의 아일랜드 지역 등을 둘러보는 '조세피난처 출장'을 떠나고 있다. 금감원은 이를 계기로 현지 금융 당국과 협조 체계를 갖출 계획이라고 한 관계자는 전했다.




외환 사범, 해마다 증가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7월
989억원
(75건)
9,138억원
(181건)
1조4,175억원
(263건)
1조9,884억원
(341건)
자료 : 관세청


금감원 고위 관계자는 직원들이 실제로 조세 회피 지역에 가본 적이 없어 현지 실태를 알아 보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조세피난처와 관련해 금감원이 이런 구체적인 활동을 벌인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이런 이유로 금융권 관계자들은 이들 지역에 진출한 국내 기업들에 대한 감독 활동이 강화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주시하고 있다.


당국은 특히 대기업들의 불법 외환 거래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관세청이 지난 9월 말 한나라당 안택수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ㄱ사, ㅅ사, 또 다른 ㅅ사, ㄷ사 등 올 들어 30대 대기업 계열사 가운데 4개 사가 조세피난처와 관련해 2천6백억원대의 불법 외환 거래를 한 혐의로 적발된 것으로 밝혀졌다.




30대 기업, 조세피난처 투자 순위(단위 : 천 달러)




































































순위 그룹 명 투자국 수 투자법인 수 투자 금액
1 삼성 8 12 941,598
2 현대 11 8 266,643
3 동양 4 1 228,164
4 한솔 5 3 231,108
5 SK 5 8 194,650
6 LG 8 8 180,785
7 대우전자 6 1 72,532
8 코오롱 4 4 72,253
9 쌍용 5 3 50,233
10 포항제철 2 3 6,921
자료 : 관세청


조세피난처 이용한 불법 외환거래 적발 실적(단위 : 억원)


































구분 전체 지역(A) 조세피난처 지역(B) 비율(B/A)
건수 금액 건수 금액 금액
2000년 263 14,175 10〈6〉 3,330〈3,286〉 24%
2001년 8월 410 20,049 14〈6〉 13,184〈13,184〉 66%
전년 대비 증감 168 54 100〈50〉 328〈331〉
*〈 〉안은 현지법인 관련 실적(자료 : 관세청)


검찰에 고발된 이들 대기업이 쓴 수법은 무역을 가장해 불법적으로 외화를 거래한 경우가 가장 많다. 예를 들면, 현지 법인이 해외 금융기관에서 차입한 돈을 수출 대금을 받은 것처럼 꾸며 국내에 들여온 뒤, 차입금 및 이자를 갚기 위해 수입 대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위장해 돈을 해외로 빼돌리는 경우이다. 이밖에 허위로 선적 서류를 만들어 수입 대금을 지급하는 것처럼 꾸며 외화를 유출한다든가, 조세피난처에 설립된 서류상의 회사(페이퍼 컴퍼니)와 무역 거래를 하면서 수출 대금을 고의로 회수하지 않는 방법으로 외화를 유출한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관세청은 이들 외에 대기업 계열사 일곱 곳이 조세피난처에서 불법 외환 거래를 한 혐의가 있다고 보고 현재 집중 조사하고 있다.


23개 대기업, 14개국에 23억3백만 달러 투자


'불법 외환 거래와의 전쟁'을 선포한 관세청은 올 들어 외환 조사 인원을 53명이나 늘리고 인천세관에 외환조사과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4명으로 구성된 대기업 전담팀을 만들어 대기업들의 수출입 통관 자료와 외환 거래 자료를 정밀하게 분석해 오고 있다. 지난해부터 올해 사이 세 차례에 걸쳐 조세피난처에 대한 기획 조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관세청 외환조사과 관계자는 돈을 빼돌렸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현지 조사를 해야 하는데 인력과 예산이 부족해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라며, 철저한 조사를 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현재 30대 기업 가운데 23개 기업이 조세피난처 14개국에 23억3백만 달러를 투자하고 있으며, 삼성 현대 동양 한솔 순으로 투자 금액이 많다. 법인 숫자로 보면 삼성이 12개이고 현대 SK LG가 각각 8개로 뒤를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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