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우한 이웃 돕고 브랜드도 키우고…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2004.1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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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불황 타개 전략으로 ‘공익 마케팅’ 각광
기업이 자선 활동에 기부금을 내거나 기업 임직원들이 자선 행사를 벌이는 공익 마케팅(CRM)이 각광을 받고 있다. 경기가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국내 대기업들은 앞다투어 거액을 기부하는가 하면 최고경영자까지 나서 자선 활동을 펼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업들은 기부금을 준조세로 받아들였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고 생색 내기에 급급했다.

과거 독재 정권이 기업들에 기부를 강요한 것이 자발적인 기부 문화의 정착을 막았다.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공익 마케팅 붐이 일자 국내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기부를 적극 받아들이고 있다. 기업 브랜드 가치와 수익성을 높이는 새로운 방안으로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로라 하는 미국 기업들이 공익 마케팅을 도입해 불황기에도 브랜드 가치와 수익성을 높이자 국내 기업들이 선진 마케팅 기법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해 삼성그룹 산하 계열사 최고경영자 24명이 지난해 12월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쪽방’을 방문해 방한복과 장갑을 전달했다. 김쌍수 LG전자 부회장은 지난해 11월 서울 전농동에 있는 ‘밥퍼운동본부’를 찾아 직접 주걱을 들고 노숙자 1천여 명에게 밥을 퍼주기도 했다. 김동진 현대차 부회장은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에 참여해 쌀 포대를 불우이웃에게 건넸다. 최태원 SK(주) ‘사랑의 집짓기 행사’에 참여해 벽에 내장재를 붙이는 작업을 했고,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아름다운 가게’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물건을 팔아 이웃돕기 성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벤처 기업도 적극 도입하고 있다. 싸이월드로 유명한 SK커뮤니케이션즈는 연예인까지 동원해 연탄 나누기 행사를 벌였다. 검색 포털 싸이트 엠파스는 지난 12월23일 홍익대 앞에서 거리 축제를 개최해 수익금 전액을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냈다. 한글 인터넷 주소 업체 넷피아는 12월23~24일 ‘넷피아 사랑 나누기’ 행사를 벌여 주변의 불우 이웃을 도왔다. 일부 벤처 기업들은 연말 연시에 ‘반짝’ 벌이는 생색 내기 행사가 아니라 연중 내내 불우이웃돕기 행사를 펼칠 계획이다.

기업들은 공익 마케팅을 통해 기업의 경제적 목표와 사회적 목표를 동시에 추구한다. 그동안 이윤 추구라는 기업 목표와 공익이라는 사회 목표가 상충하는 사례가 잦아 기업이 자선단체와 손잡고 공동 마케팅을 벌인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기업으로 하여금 발상의 전환을 일으키도록 한 것은 소비자의 의식 변화다.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소비자들이 기업의 공익성을 제품 선택의 기준으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은 소비자 행동 변화를 마케팅 전문가들은 ‘매슬로우 욕구단계설’로 설명한다. 생존 욕구가 충족된 소비자들은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중시하고 최종적으로 자아 실현 욕구를 총족하기 위해 소비한다는 것이다. 자아 실현 단계까지 올라온 소비자들은 기업이 올바른 가치를 추구하기를 요구한다.
“제품 안 팔릴 바에야 신뢰를 팔자”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산업 구조 조정, 환경오염, 임금 격차 확대 등으로 인해 기업에 대한 소비자의 불만은 깊어지고 있다. 이윤 극대화라는 존립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기업들은 부정과 탈법을 서슴없이 저지르는가 하면 환경을 오염시키고 소비자 권익을 무시했다. 이에 저항해 소비자들은 환경과 사회 문제보다 이윤을 앞세우는 기업에 대해 제품 불매운동을 벌이거나 온·오프 라인을 활용해 안티 캠페인을 펼치기 시작했다. 소비자 사이에 특정 기업이 좋지 않다는 입소문이 인터넷을 통해 빠르게 전파되면 바로 해당 기업의 수익 악화로 이어졌다. 마케팅 담당 부서가 가장 우려하는 부정적 구전 효과(Word of mouth effect)가 발생하는 것이다.

또 주요 시장이 성숙기로 접어들어 경쟁이 격화하면서 경쟁 제품 사이에 차별성이 줄고 있다. 제품 기술이 보편화하고 원가 절감 노력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서 제품 사이에 차이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제품 성능이나 품질에 차이가 없어지자 소비자들은 브랜드가 주는 이미지나 가치를 제품 선택 기준으로 삼는 성향이 강해졌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거액의 마케팅 예산을 투입한다. 제이 웰시 아멕스 마케팅 이사는 “아멕스 카드는 공익 마케팅 캠페인을 잇달아 펼쳐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당연히 매출이 늘었다”라고 말했다.

지금과 같은 불황기에는 공익 마케팅이 주목받기 마련이다. 위스키 업계는 최근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일제히 공익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접대비 실명제와 성매매 특별법 영향을 받아 위스키 소비자가 줄어들자 음주 운전 방지 캠페인을 벌이거나 해충 방제 서비스를 제공해 브랜드 이미지를 개선하고 매출을 늘리겠다는 전략이다.

하지만 공익 마케팅은 당장의 효과를 바라기보다는 수익 기반을 확충하는 중·장기 전략으로 활용해야 한다. 경기 침체기에는 제품을 광고해도 구매 증가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브랜드 가치와 소비자 충성도를 높이는 것이 효과적이다. 호황이 찾아오면 브랜드 자산을 착실하게 쌓아놓은 기업은 자연스럽게 매출 증가라는 과실을 거둔다. 이문규 교수(연세대·경영학과)는 “불황기 기업 마케팅은 잠재 수요 기반을 늘리기 위해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말했다.

기업이 소비자 의식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채택한 것이 공익 마케팅이다. 우수한 미국 대 기업들은 1980년대에 공익 마케팅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아멕스 카드가 1983년 자유의 여신상 보수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고객이 자사 카드를 사용할 때마다 1센트, 신규 가입 한 건당 1달러를 기부한 것이 모태가 되어 전업종으로 파급되었다. 지금 미국 기업들은 한 해 1조 달러가 넘는 예산을 투입해 갖가지 공익 마케팅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동안 국내의 기부 문화가 경제 규모에 비해 활성화하지 못했다. 한 해 자선 기부금 총액은 3천억원을 넘지 못한다. 1인당 평균 기부금도 6천원 안팎에 불과하다. 미국은 국민 98%가 기부금을 내는데, 액수는 1인당 해마다 70만원에 이른다. 영국은 연간 기부금 총액이 40조원에 이르고 1인당 기부액도 24만원이나 된다. 자선 단체들은 한차례 공익 마케팅이 유행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기업을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기부 문화가 사회 전체로 확산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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