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개 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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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6.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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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견 시장 ‘수입품’이 독식…가짜 혈통서·엉터리 검역서 판쳐
“저두 살짜리 블러드하운드가 1천5백만원은 족히 넘습니다. 이쪽에 있는 비숑 프리제는 7백만원 정도 합니다.” 경기도 광주시 근교에 자리잡은 농장 ‘화랑장’의 안후중씨(33)는 자랑스럽게 개들을 소개했다. 3천 평 남짓한 이곳 농장에 4백 마리가 넘는 개가 산다. 애완견도 있지만, 싸움개나 사냥개 등 주로 특수 목적용 개가 많다. 대부분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수입한 개들이다. 안씨는 “수입견을 찾는 사람이 넘친다. 언제나 수요 초과다”라고 말했다. 애견 시장이 날로 커지면서 ‘물 건너 오는 개’가 늘어나고 있다. 국립수과학검역소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배와 비행기를 통해 수입된 개는 1만8천7백4 마리다. 지난해 같은 기간 1만5천7백29 마리에 비해 20% 가량 늘었다. 특히 값비싼 고급 개일수록 수입 의존도가 높다. 사료와 의약품 등 개와 관련된 산업도 대부분 수입품이다(58~59쪽 상자 기사 참조). 국내 애견인이 3백만 명을 넘어서고 있지만 아직 한국 애완동물 산업은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지난 5월15일 오후 2시, 하바로프스크발 달라비아 항공 TU154 화물기가 인천공항에 들어왔다. 이 비행기에는 소중히 다루어야 할 짐이 있었다. 태어난 지 1년이 채 안된 아메리칸 코카 스파니엘 강아지 6마리가 구멍이 뚫린 상자에 담겨 있던 것이다. 강아지 화물은 인천항공 화물청사 B창고 한 켠에 옮겨졌다. 거기에는 이미 도착한 다른 페니키즈 10여 마리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시아나 보세창고 화물담당 정민경씨(32)는 “하루에 강아지가 1백50 마리 정도씩 수입된다”라고 말했다. 개들은 한 곳에 모이지 않고 인천공항 창고 여기저기에 흩어져 보관된다. 개가 도착하면 검역원이 간단히 검역하는데 주로 화물 발송자가 보낸 서류를 중심으로 살핀다. 검역비는 2만∼3만 원. 서류가 미비하거나 병이 있는 개들은 인청공항 인근에 있는 계류장으로 보내진다. 이 날 달라비아 항공을 통해 들어온 개들은 모두 검역을 통과했다. 개 주인들은 창고에 있는 개들을 직접 인수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공항에 사무실이 있는 관세사를 통해 대신 찾는다. 중부관세사 김현수 과장은 “요즘 중국에서 오는 개들이 많다. 한 달에 100마리 이상이다”라고 말했다. 개 수입을 전문으로 대행하는 업체도 있다. ‘국제애견수입사’ ‘가가쇼독애견수입사’ 등은 전문가들이 주로 이용하는 회사이다. 세금은 개의 종류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개값의 30% 정도다. 오후 5시. 러시아에서 수입해온 코카 스파니엘 3마리의 주인이 나타났다. 안양농장 이 아무개씨(43)였다. 그는 러시아 여성 한 사람을 데리고 직접 수령하러 왔다. 이씨는 “개 수입열풍은 지금이 절정이다. 여름이 되면 수입량이 줄어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부가 6월부터 1인당 한번에 9마리 이상 수입하지 못하도록 규제할 것이라는 소문에 대해 그는 “쓸데없는 짓이다”라며 불만을 나타냈다.

국내에 수입되는 개들은 미국산과 중국산이 각각 30% 가량 되고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이 뒤를 잇는다. 미국에서 수입한 개들은 비싼 순종 희귀견이 많고, 중국에서 수입한 개들은 페니키즈가 많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건너온 개들은 가격이 보통 수백만원 대에 이를 정도로 비싸다. 이들 나라는 혈통서를 꼼꼼히 작성한다. 그래서 애견가들은 미국산·유럽산 순종에 대한 신뢰도가 높다. 5월14일 서울 압구정동에 있는 애견 가게 ‘러블리하우스’에 한 무리의 남자 손님이 찾아왔다. 그들은 카탈로그를 보더니 “좀더 특별한 개 없어요? 이건 너무 흔해서”라며 독특한 개를 찾다가 돌아갔다. 러블리하우스 원군자씨는 “요즘 손님들은 남들이 가지지 않은 개를 소유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희귀한 수입견이 인기다”라고 말했다. 국내에 몇 마리 없다는 ‘헝가리안 쿠바츠’와 생활하는 박혜영씨. 그녀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쳐다본다. 종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라고 말했다.

구미에서 수입되는 개와 달리 중국산 수입 견은 대개 50만원 내외로 비교적 싼 편이다. 중국에서 개를 전문으로 수입하는 이 아무개씨(35)는 “1주일에 50 마리 가량 수입한다. 한달에 2백 마리는 된다. 마리당 평균 4만원 정도 남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페니키즈를 주로 수입한다.

하지만 애견가들 사이에서는 중국산 개에 대한 불신이 높다. 한 애견 관련 단체 간부는 “한국은 중국 개들의 쓰레기통이다”라고 평했다. 심지어 중국산 개들에게는 마약을 먹인다는 소문도 나돈다. 수도권의 한 농장주는 “얼마 전 중국에서 수입한 개를 경매장에서 5백만원 대에 산 적이 있다. 오랫동안 여행하고 온 터라 개가 지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경매장에서 펄펄 날뛰었다. 알고 보니 발육에 문제가 있어 스테로이드를 복용한 개와 유사한 증상을 보였다”라며 분개했다. 그는 현재 그 개를 안양에 있는 도핑테스트 센터에 보내 약물 복용 분석을 의뢰해놓은 상태다. 또 다른 농장주는 “중국에서 개를 배에 싣기 전에 아편을 먹인다는 소문이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서울 퇴계로 일대 전문가들은 “이런 소문들이 공식으로 확인된 적은 없다. 정말로 약물을 먹인다면, 경매장까지 오기 전에 죽을 확률이 높다”라고 말한다. 러시아산·중국산 수입 개들에 대해 이처럼 불신이 높은 이유는 서류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경기도 한 애견 경매장 관계자는 “인천공항에서 검역 직전에 검역 서류를 작성하는 수입업자들을 본 적이 있다. 수의사가 작성하게 되어 있는 접종 날짜는 비워져 있었고, 수입업자가 마음대로 채워넣었다”라고 폭로했다. 불신은 혈통서 문제로도 이어진다. 알아볼 수 없는 외국어인 데다 출처마저 불분명한 러시아·중국 혈통서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40대 초반 개 사업가인 김 아무개씨는 5월 초 황당한 일을 겪었다. 그는 경매장에서 러시아 혈통서를 가진 수입견 코카 스페니얼 초코 버프 암컷을 3백만원에 샀다. 그러나 혈통서에는 수놈으로 적혀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러시아어를 이해할 수 없었던 탓이다. 그는 경매장에 항의했다. 뒤늦게 확인한 결과 수입 과정에서 혈통서가 칼라 복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애견협회 최지용 이사는 “수입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처음에는 외국에서 수입을 하다 이후 자체적으로 혈통을 관리해 지금은 오히려 수출을 하고 있다. 우리는 수입된 개들의 2세, 3세 관리가 되지 않아, 자체 생산을 하지 못하고 끝없이 수입하는 실정이다”라며 안타까워했다. 외국 개들이 애견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양상과는 대조적으로 진돗개·삽살개 같은 토종개들은 날이 갈수록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애견의 거리라는 서울 퇴계로에 진돗개를 파는 곳은 단 한 군데밖에 없다. 주변 가게들은 구경하는 손님들을 안내하느라 분주한 반면, 이 가게는 한 시간이 지나도록 찾는 이가 없어 한가하기만 했다. 15년 동안 진돗개만 키웠다는 이곳 사장은 “요즘 사람들은 작고 귀여운 개나, 희귀한 수입 개를 좋아한다. 진돗개는 찬밥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진돗개만 팔아서는 수지가 맞지 않기 때문인지 가게 절반을 떼서 한약상을 겸하고 있었다.

진돗개 관리의 가장 큰 문제는 잡종이 너무 많아 표준 진돗개를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현재 진돗개시험연구소 등에서 품종을 관리하지만 아직 국제애견단체(케넬클럽)로부터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 현재 진돗개는 국제협회(FCI)에 가등록되어 있는데 2006년에야 정식 등록이 가능하다. 화랑장 농장 안후중씨는 “품종 관리는 몇몇 전문가들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사회의 애견 문화와도 관련이 있다. 토종개의 경우 수출은커녕 오히려 장차 진돗개를 영국이나 독일에서 수입해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일본 아키타견은 일본보다 영국산이 더 높게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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