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노갑·한광옥·박지원의 ‘구치소 생활’기
  • 나권일 (nafresisapress.comkr)
  • 승인 2003.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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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와 싸우며 책장 넘기고… 영어 공부·성경 읽기·몸 만들기 등 열중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 청계산 자락에 자리잡은 서울구치소(소장 양봉태)는 이른바 ‘범털’들의 집합소다. 서울지방법원과 서울고등법원에 사건이 계류된 미결수 가운데서도 각종 게이트에 연루되어 유명세를 치른 정치·경제 사범이 특히 많이 수감되어 있다. 김대중 정부 때 권세를 휘둘렀던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한광옥 전 민주당 대표·박지원 전 문화관광부장관 등 '국민의정부 범털 3인방'도 서울구치소에서 겨우살이에 들어갔다.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73)은 ‘동교동계 맏형’ 답게 감옥살이에서도 모범이다. 그는 요즘 영어 공부에 재미를 붙였다. 시사 영어를 익히려고 시간이 날 때마다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을 비롯해 CNN이나 AFN 관련 잡지를 신청해 탐독한다. ‘수형자 번호 1986번’ 노인이 돋보기 안경에 두툼한 영한사전을 펼쳐들고 공부하는 모습은 몇몇 교도관들에게는 익숙한 장면이 되었다. 권씨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하기 전인 1959년부터 3년 동안 전남 목포여고에서 영어를 가르친 적이 있다.

권노갑씨, 기억력 쇠퇴 심해져

권씨가 영어 공부에 뛰어든 것은 구치소에서 무료한 시간을 죽이려는 뜻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기억력 악화 증세이다. 권씨의 변호사들에 따르면, 최근 그의 건강 상태는 최악이다. 잠깐씩 정신을 놓아버리는 ‘뇌빈혈’ 증세가 깊어졌다. 권씨의 한 측근은 이에 대해 김영완씨와 이익치씨의 거짓 진술 때문에 화병까지 겹쳤다고 설명했다( 하단 박스 기사 참조).

현대 비자금 2백억원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권씨는, 지난 9월16일 첫 재판 때 재판부가 주민등록번호를 묻자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며 더듬거렸는가 하면, 주소나 본적지도 틀리게 답해 재판부가 정정해 주었을 정도로 비정상적인 건강 상태를 보였다. 그는 현재 지병인 당뇨에다 고혈압·말초동맥경화·백내장·전립선비대증 등 열 가지 병을 앓고 있다고 한다. 권씨 변론을 맡고있는 문형섭 변호사(법무법인 한백)는 “날이 추워져 큰일이다. 고령인데, 큰일이라도 당하기 전에 재판부의 빠른 판단을 기대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권씨는 건강에 자신을 잃으면서 마음도 많이 약해진 듯하다. 최근에는 MBC 인기 주말 드라마 <회전목마>에 푹 빠졌다고 한다. 톱스타 장서희와 수 애 등이 출연하는 <회전목마>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서로 다른 사랑과 운명을 찾아가는 두 자매의 엇갈린 인생을 그린 드라마. 서울구치소는 드라마를 녹화해 실제 방영 시간보다 1시간 늦게 시청토록 하고 있는데, 권씨가 드라마를 보면서 몇 차례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고 한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고생하며 살아가는 자매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더라는 것.

권씨 가족은 시사 월간지와 주간지 등 정기 간행물도 꼬박꼬박 구치소로 보내주고 있다. 권씨는 특히 권력의 부침과 인생을 다룬 역사책에 관심이 보인다고 한다. 지난해 김홍일 민주당 의원이 보내준 유홍준씨의 <화인열전>을 탐독한 데 이어, 올 여름에는 소설가 황석영씨가 쓴 <삼국지> 10권 전집을 독파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힐러리 클린턴의 자서전 <살아 있는 역사>와 역사인물서 <서태후>를 즐겨 읽는다고 한다. 권씨는 최근의 복잡한 정국 상황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꾹 참고 우선 자신의 건강을 추스르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는 것이 측근의 말이다.

한광옥씨, 고혈압·뇌경색 증상으로 고생

서울구치소에서 화병을 앓고 있는 민주당 실세는 권씨뿐이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한광옥 전 민주당 대표(61)도 같은 곳에서 세월을 죽이고 있다. 한씨는 지난 10월24일 열린 항소심 재판에서 “30여년 정치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다니 비통한 심정이다”라면서 건강진단서를 첨부해 병보석을 신청했다. 변호사는 한씨가 구치소에서 고혈압과 뇌경색 증상 때문에 머리가 어지럽고 구토가 잦아 고생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2000년 삼청동 대통령비서실장 공관에서 안상태 전 나라종금 사장으로부터 3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된 뒤 1심 재판에서 징역 2년 6월에 추징금 3천만원을 선고받았다.
기독교 신자로 알려진 한씨는 ‘성경책과 함께 산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구치소 안에서 자나깨나 성경 공부에 몰두하고 있다. 가족이 보내준 <조선왕조실록> 요약본과 <손자병법>도 틈틈이 읽지만 성경에 더 손이 간다고. 건강 관리는 매일 아침 9시부터 30분 동안 걷기 운동으로 대신한다. 부인과 딸, 그리고 민주당 지인들이 매일처럼 면회하는 것에 위안을 삼고 있다고 한다. 권노갑씨나 박지원씨는 면회 시간에 서로 구치소 통로를 오가면서 가끔씩 마주치기도 하지만 대화는 나누지 못했다. 각자 머무르고 있는 사동(舍棟)이 달라 운동 시간에도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구치소측 설명이다.

한씨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사단법인 통일미래연구원’ 회원들은 재판 때마다 방청석에 모여 그를 응원한다. 박양수·장재식 의원, 민추협 전 사업국장 송재호씨가 한씨와 가까운 인사로 꼽힌다. 통일미래연구원의 한 직원은 “자기가 감옥살이하는 것보다 민주당 분당 사태에 더 비통해 하더라. 풀려나면 민주당 통합을 위해 애쓸 분이다”라고 말했다. 한씨 가족과 지인들은 재판부의 병보석 허가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있다.

김대중 정부 실세들 가운데 그나마 ‘혈기 왕성’한 재소자는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장관(수형번호 1617번)이다. 박씨의 나이(61)는 한광옥 전 대표와 동갑이지만 건강은 훨씬 낫다. 박씨는 요즘 구치소 안에서 몸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다. 운동 시간에도 걷기보다는 땀을 흘릴 정도로 열심히 왕복 달리기를 한다고 한다. 최근 박씨를 특별 면회(장소 변경 접견)했던 그의 중학교 동창 장 아무개씨는 “얼굴이 좋아 보인다고 했더니 ‘술 끊어서 좋아졌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박씨는 현재 구치소 내에서도 ‘실세’이다. 서울구치소에 살고 있는 국민의정부 3대 범털 가운데 영치금 액수가 단연 최고다. 10월25일 현재 박씨의 영치금이 4백22만원, 한광옥씨가 3백75만원, 권노갑씨가 37만원이다. 영치금 액수는 남은 액수가 100만원 이하일 때만 외부인이 추가로 입금할 수 있다.

박지원씨 “무죄 입증 자신”… 총선 출마설도

박씨는 변호인단 진용도 막강하다. 대검 차장을 지낸 김학재 변호사를 비롯해 대한변협 총무이사인 김주원 변호사, 김대웅 전 광주고검장이 각각 대표를 맡고있는 로펌 세 곳과 박씨의 단국대학 후배인 소동기 변호사가 함께 변호인단을 구성하고 있다. 이에 비해 권노갑씨는 법무법인 한백, 한광옥씨는 법무법인 율촌이 변론을 도맡고 있다.

박지원씨는 법정에서도 여유가 넘쳐 흘렀다. 지난 10월24일 오후2시 서울지방법원 309호 형사법정. 박씨의 재판정에는 1시간 전부터 전남 진도에서 올라온 친척과 지인 들이 몰려들었다. 재판 시작 5분 전에 검은 양복 차림인 박씨가 들어서자 방청석에 앉아있던 지인과 옛날 보좌진이 일제히 일어섰다. 박씨의 얼굴도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듯 여유가 있었다. 그는 재판부가 퇴정하고 난 뒤 방청석에 서 있는 지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기도 했다. 그 자리가 법정이라는 것을 잊은 듯 방청객 몇 명이 ‘눈도장’을 찍으려고 앞으로 달려가다가 제지당했다.

박씨의 측근들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무죄 입증과 명예 회복에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한때 그가 명예 회복을 위해 17대 총선에 출마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박씨의 한 지인은 “해남·진도가 지역구인데, 진도 인구가 해남의 30% 수준이어서 어렵다. 광주라면 호남 정서에 기댈 수도 있지만, 출마해도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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