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 당국의 빗나간 고위직 사냥
  • 권은중 기자 (jungk@sisapress.com)
  • 승인 2000.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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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 혐의 박종세 전 식약청장 2심에서도 무죄…‘제2 이운영 사건’ 될 수도
박지원 문광부장관이 대출 압력 의혹으로 옷을 벗느냐 마느냐를 놓고 온 나라가 시끄럽던 9월19일, 서울고법에서는 관심을 끄는 권력형 비리 사건 재판이 열렸다.

초대 식품의약품안전청(식약청) 청장인 박종세씨는 보건복지부 산하 중앙약사심의위원회 신약분과위원으로 있던 1992년부터 한·일 합작 제약사인 ㄴ제약 사장 강 아무개씨로부터 모두 1억8천5백만원을 뇌물로 받은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었다. 이 날 열린 2심에서도 서울고법 형사10부는 무죄 판결을 내렸다.

중앙약사심의위가 임명장 없이 사안이 있을 때마다 구성되기 때문에(인력풀제) 당시 분과위원이던 박씨를 공무원이라고 볼 수 없어 뇌물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1심 판결을 인정한 것이다. 검찰은 이에 반발해 대법원에 상고했다. 검찰은 사실상 의약품 심사 권한을 가지고 있는 중앙약사심의위원회 위원도 공무원으로 볼 수 있다는 입장이다. 검찰 관계자는 1심 판결과 달리 2심에서 이 돈이 청탁금으로 전달되었다는 점을 인정했기 때문에 상고한다고 말했다.

현직 차관급 관료인 식약청장이 7~8년 전에 공무원 신분이 아닐 때 받은 ‘연구용역비’ 때문에 구속되었다가 무죄 판결을 받은 과정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국민의 정부 초기에 공직자 기강 확립을 위해 벌였던 사정 작업 중의 하나였던 이 사건에는 청와대와 경찰청 조사과(일명 사직동팀)가 개입한 흔적이 있다. 게다가 제약회사 대주주로 있는 민주당 국회의원이 배후에서 작용했다는 의혹마저 제기되고 있다. 한 전문 관료를 죽이기 위한 각본이 존재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 예로 수뢰자는 구속되었는데 뇌물을 준 ㄴ제약 강사장은 입건조차 되지 않았다. 또 강사장은 검찰에서는 잘 봐달라고 돈을 건넸다고 진술했다가 법정에서는 신약 개발을 위한 연구 용역비로 주었다고 뒤집었다. 공동 연구를 하기로 했던 포항공대 김 아무개 교수는 박씨와 연구계약서를 쓴 사실이 없다고 검찰에서 진술한 내용을 법원에서 번복했다.

당사자인 박씨는 2심에서까지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말을 아끼고 있다. 대법원 판결이 남아 있어 언론과의 접촉을 피하고 있다. 정변호사는 “박 전 청장이 아직도 검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언론을 꺼린다. 박씨가 수사 과정에서 가혹 행위를 당했다고 호소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검찰 관계자는 “차관에게 가혹 행위를 할 배짱 있는 검사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국 메릴랜드 의과대학 교수로 있던 박씨는 1986년 정부 요청으로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에서 선수들의 약물 복용 여부를 감시하는 도핑컨트롤센터 소장을 맡기 위해 귀국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 신설된 이 센터는 올림픽 100m 경기에서 세계 기록을 깨며 우승한 벤 존슨이 약물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밝혀내 유명세를 탔다. 이후 신약 개발과 유해 물질 연구를 계속해 오던 박씨는 1996년 식품의약품안전본부 독성연구소 소장으로 일하다 1998년 3월 복지부로부터 독립해 승격한 식약청 초대 청장으로 임명되었다.

초대 청장으로 임명되자마자 그는 우수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박사 학위를 가진 외부 인사를 영입하고 공개 채용을 실시했으며, 조직에 활력을 주기 위해 연구 인력 순환 보직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이런 인사는 행정 인력과 일부 연구원들의 내부 반발을 부른 끝에 투서로 이어졌다.

박청장의 발목을 잡아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중국산 뇌염 백신인 ‘씨디제박스’였다. 백신은 죽은 바이러스를 이용하는 사백신과 살아 있는 바이러스를 만드는 생백신으로 나뉘는데, 그 때까지 뇌염 백신은 사백신만 허용했다. 식약청의 전신인 식품의약품안전본부는 1997년부터 뇌염 생백신 수입 허가를 놓고 고민했다. 뇌염 생백신에는 인간의 피에서 추출한 혈청이 들어가기 때문에 피가 깨끗해야 하는데, 중국산 혈청이 안전한지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본부장으로 백신의 수입 허가를 지휘하다가 그 권한을 신임 청장에게 넘긴 김종대 복지문제연구소 소장은 “이 약품 인허가를 둘러싸고 결국 박청장이 희생양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한 김씨 역시 백신 파동의 피해자다.

이 중국산 백신을 수입하려는 회사는 ㅂ제약이었고, 판매는 당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이던 김 아무개 전 의원이 회장으로 있는 ㅎ제약이 할 예정이었다. 만약 이 백신이 수입된다면 뇌염의 유행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수백억원 규모의 국내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업체들의 로비가 대단했다.

특히 김의원 보좌관은 김종대 본부장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김의원이 백신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김씨에 따르면 1997년 9월과 10월에는 김의원 본인이 아예 국감 관계 자료를 얻으러 왔다며 서울 녹번동 식품의약품안전본부 사무실에 예고 없이 찾아오기도 했다. 국회의원이 국감 자료를 구하려고 직접 공무원을 찾는 것은 거의 없는 일이다.

상황이 복잡해지자 김본부장은 잡음을 피하기 위해 1997년 12월 뇌염 백신 기준에 관한 회의를 공개로 열었다. 이 날 초빙된 전문자문위원 12명은 ㅂ제약이 제출한 자료로는 백신의 질적 관리가 불충분하다고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이날 ㅂ제약 연구진도 초청했으나 불참했다. 결국 1998년 5월 ㅂ제약 뇌염 백신은 수입판매 반려 처분을 받았다. ㅂ제약 관계자는 “1997년 임상 실험용 도입이라는 조건부 허가를 받았으나 식약청의 기술적인 요구 조건이 까다로워 국내 판매 허가를 받지 못했다. 그동안 수백억원을 손해봤다”라고 말했다. 지금까지도 ㅂ사는 이 백신을 도입하는 일을 추진하고 있다.

1급 공무원으로서 차관 승진을 바라보고 있던 김씨에게 사직동팀 형사가 찾아온 것은 대선이 끝난 1997년 말이었다. 그는 찾아온 사직동팀 형사로부터 ‘차관이나 청장이 되고 싶으면 백신 문제를 잘 처리하는 것이 좋다’는 말을 들었다. 사직동팀은 식품의약품안전본부가 ㄴ제약의 로비를 받고 중국산 뇌염 백신 도입을 의도적으로 막고 있다는 첩보에 대해 수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새 정부 출범 이후 대기 발령되었다가 복지부 기획관리실장에 임명되었다. 초대 식약청장으로는 박종세 소장이 임명되었다. 김씨는 “백신과 관련된 제보가 인사에 반영되었다는 말을 들었다”라고 말했다.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1998년 7월 대검은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를 비롯한 사회 지도층 100여명을 비리 혐의로 내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씨와 박씨는 신약 개발과 백신 도입 과정에서 업체로부터 금품을 수수했다는 혐의로 검찰에 소환되었고 계좌 추적까지 받았다. 검찰 수사 결과 두 사람은 8월11일 무혐의로 풀려났다. 당시 수사를 맡았던 검찰 관계자는 “청와대의 지시는 없었고 업계와 내부 제보로 수사를 하게 되었다”라고 잘라 말했다. 전 청와대 사정 관계자도 “검찰 단독 사건이다. 박청장 사건을 청와대가 지시한 적은 없었다”라고 말했다.

한 달이 지난 9월 대검 중수부는 사회 지도층 2백여명에 대해 사정 수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는데, 박 전 청장이 들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김씨는 빠졌다. 검찰은 10월부터 박씨의 계좌를 추적해 ㄴ제약으로부터 1억8천만원이 흘러들어 갔다는 것을 파악했다. 1999년 1월 검찰은 박씨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했다.

박 전 청장이 받은 돈이 뇌물인지 여부는 이제 대법원으로 공이 넘어갔다. 하지만 이미 박청장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박씨는 무죄가 확정되어도 공직으로 돌아올 수 없다. 정변호사는 “공무원 신분도 아니고 직무와 관련해 뇌물을 받은 것도 아닌데 무조건 구속하는 것에는 어떤 음모가 있지 않는가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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