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교원 노조''의 역사 바로 세우기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1999.03.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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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교조' 부위원장, 용공 조작 사건 재심 청구… 40년 만에 명예회복 나서
‘전교조는 4·19 교원노조라는 민족적이며 민주적인 전통을 잇고 있습니다.’ 오는 7월 합법 조직으로 거듭나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선전 팜플렛은 이렇게 시작한다.

4·19 교원노조. 이는 4·19 혁명 직후 교사들이 결성했던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교조)를 일컫는다. 오늘날 이 단체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40년 전 이미 1천5백명에 이르는 해직 교사를 낳았던 이른바 ‘교조 사건’은 녹슨 청동 거울처럼 역사에서 잊혀 가고 있었다(89년 전교조 사건으로 해직된 교사도 1천5백명이다).

그런데 이 청동 거울을 새삼 꺼내들고 녹을 닦는 사람이 나타났다. 교조 부위원장을 지낸 강기철씨(74). 교조 사건에 연루되어 7년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강씨는 최근 이 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는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담당 변호사 강신옥). ‘뒤늦게나마 용공 조작된 교조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억울하게 희생된 동료 교사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강씨가 밝히는 재심 청구 사유이다.

“2만여 명 가입, 1천5백명 해직”

강씨의 주장이 정당한지 따지기 위해서는 교조의 역사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60년 5월3일, 주요 일간지에는 ‘한국 교원 동지의 분기를 촉구함’이라는 제목의 격문이 광고로 실렸다. 교조의 태동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던 이 격문은 대구 지역 교원노동조합결성위원회가 작성했다.

4·19 혁명이 일어난 지 불과 2주일. 격문은 먼저 승리를 자축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구는 자못 비장했다. “‘선생님, 정의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는 생명을 바쳐 싸워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정열에 불타던 그 눈동자, ‘비겁합니다, 선생님!’ 하고 외치던 그들의 울부짖음! 어찌 여기에 양심의 가책과 자괴가 없을소냐!”

교조가 태어난 배경을 이해하는 열쇠는 여기에 담겨 있다. 당시 격문을 직접 작성했다는 교조 사무국장 이 목씨(77·전교조 지도자문위원)는 ‘4·19가 끝난 직후 교사들은 차마 부끄러워 학생 앞에 설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한다.

4·19 혁명의 도화선으로 평가되는 2·28 학생 시위의 본고장 대구는 상황이 더욱 심각했다. 일요일이었던 2월28일 이 지역 교사들은 장 면씨(당시 민주당 부통령 후보)의 유세를 방해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등교를 강제하고, 이를 거부해 교문을 박차고 나가는 학생들을 다시 막아서는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해야 했다.

그 뒤 치러진 3·15 부정 선거는 교사들을 더 깊은 자괴감에 빠뜨렸다. 전국 곳곳에서 교사들이 조직적으로 동원되었다. 선거 전 가정 방문을 통해 학부모 정치 성향을 파악하는 것이 교사들의 몫이었다. 이른바 ‘4할 사전 투표’ ‘3인조·5인조 공개 투표’ 따위 부정 선거의 보조 진행 요원 역할을 맡은 것도 교사들이었다.

4·19 혁명이 터지자마자 전국 곳곳에서 동시 다발로 교원 노조 설립 움직임이 일어난 배경에는 이같은 부끄러운 과거가 깔려 있었다. 7월29일 전국적인 조직망을 구축한 교조는 ‘학원의 자유’와 ‘교육의 자주성 회복’을 주된 구호로 내걸었다.

그로부터 전개된 교조의 역사는 오늘날 전교조가 밟은 역사와 상당 부분 비슷하다. 이들은 먼저 교원 노조의 합법성을 둘러싸고 정부와 치열하게 싸웠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교조가 합법성 ‘쟁취’를 위해 싸웠던 반면 교조는 합법성 ‘수호’를 위해 싸웠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노동조합법에 교사의 노조 결성을 막는 조항은 없었다. 그러나 ‘자연발생적 현상이니 (교조를) 방임하겠다’던 과도 정부는 곧 ‘불법이니 해체시키겠다’고 태도를 바꾸었다. 국가공무원법 37조(정치 활동·집단 행동 금지) 등을 적용한 법 해석이었다. 뒤이어 들어선 장 면 정권은 아예 노동조합법을 개정하려고 했다. 당시 노동조합법 제6조는 제복 근무를 하는 소방관·형무관·경찰관 등은 노조를 결성할 수 없게끔 못박고 있었다. 여기에 교사를 끼워넣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교조의 반발에 밀려 이 법안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보수 진영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받은 것도 교조와 전교조의 유사점이다. 60년 6월28일 <조선일보> 시론은 ‘교사라는 직책의 국가적 사명으로 보나 또 그 봉사의 직무 관계로 보아 (중략) 공장의 직공과 같은 노동자와 그 성질을 많이 달리하고 있음을 우리는 인정치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교사가 노동자냐 아니냐’ 하는 논쟁은 그 뿌리가 40년 전에 닿아 있는 셈이다.

이러한 혼돈의 와중에도 교조는 조직을 정비해 갔다. 합법성 수호 투쟁과 더불어 독재 정권에 아부한 악질 교육 행정 관료 숙정, 사학 재단 비리 척결 등 학원 민주화 운동도 전개했다. 교조가 정식 출범한 60년 7월29일 현재 교조 본부가 파악한 전국 조합원은 2만여 명에 이르렀다(당시 전체 교사 수는 8만3천여 명). 특히 경남·경북 지역에서 전체 교사의 70% 이상이 교조에 가입했다. 그 뒤 정부 탄압이 본격화하면서 조합원 명단을 공개하지 않아 공식 집계가 없지만, 그 수가 한때 4만여 명에 이르기도 했다는 것이 강기철씨의 주장이다.

오늘날 이를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이들이 뻗어나가는 기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교조가 당시 해체를 요구한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한국교총)의 기록에 드러난다. ‘교원 노조로부터 어용 단체로 몰린 교총은 일대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8만2천명이었던 교총 회원은 4·19 혁명 이후 5만여 명으로 급격히 감소하였다’(<교총 40년사>). 교총을 탈퇴한 사람의 상당수가 교조에 가담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교조 간부들 용공 분자로 몰아 대거 연행

그러나 이들의 기세는 불과 1년 만에 산산 조각이 나고 말았다. 5·16 쿠데타로 등장한 군사 정권은 집권하자마자 혁신계 정당·사회 단체 간부들을 ‘용공 분자’로 몰아 잡아들였다. 교조 간부도 1천5백명 가까이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부터 교조에 대한 ‘3단계 정치 조작 시나리오’가 시작되었다고 강기철씨는 주장한다.

61년 6월8일 문희석 당시 문교부장관은 전국 대학 총학장회의에서 교조를 해체하고 조합 간부 1천5백명을 파면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교조가 민주당 정부를 전복하고 대한민국을 공산화하려던 음모 사실이 발각되었다.” 강기철씨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1단계 조작 시나리오였다.

신문 결과 혐의 사실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자, 혁명 정권은 다시 월남한 교조 간부를 중심으로 간첩 혐의를 집중 추궁하기 시작했다. ‘공산화 사명을 띠고 교육계에 침투한 것 아니냐’는 식이었다. 강씨는 이를 2단계 시나리오라고 부른다. 이 과정에서 월남한 교사들이 고초를 겪었다. 경기도연합회 위원장이었던 이동걸씨는 이때 얻은 고문 후유증과 화병에 시달리다 출옥한 지 얼마 안되어 자결하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 검찰 공소장에는 ‘용공 혐의’가 모두 빠져 있었다(연행된 1천5백명 가운데 재판에 회부된 교조 간부는 6명에 불과했다). ‘공소장 내용이야말로 교조 내부에 공산주의자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반증’이라는 강씨는, 조합원 모두가 정부가 사상·신원을 보증한 현직 공무원이었던 만큼 이를 용공 사건으로 몰고 가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신 이들에게는 새로운 올가미가 기다리고 있었다. 혁명 정부가 급조한 ‘특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6조가 그것이었다. 제정일로부터 3년 6개월 이전까지 소급이 가능해 ‘소급법’이라고도 불렸던 이 법 제6조는 ‘반국가 단체에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면서 그 단체의 활동을 찬양·고무·동조하거나 또는 기타의 방법으로 그 목적 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를 처벌하게끔 규정하고 있었다.

문제는 ‘반국가 단체에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면서’를 판단하는 기준이 순전히 혁명 검찰에 맡겨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훗날 국가보안법의 대표적인 독소 조항으로 남아 악명을 떨친 이 조항에 의거해 검찰이 문제 삼은 것은 교조가 △2대 악법(데모규제법·반공임시특별법) 반대 투쟁에 참가했고 △서울대학교 민통련이 주장한 남북학생회담안을 환영한다고 발표한 대목이었다.

그러나 장 면 정권이 제정하려 했던 2대 악법에 대해서는 4·19 정신을 역행한 반민주 악법이라는 이유에서 교조뿐 아니라 모든 정당·사회 단체, 언론 매체가 반대했다는 것이 강기철씨의 주장이다. 더욱이 남북학생회담안에 대해서는 교조가 이를 환영·지지하거나 동조하는 성명서 또는 통일결의안을 발표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강씨는 강변했다.

그러나 혁명재판부는 이같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에 회부된 교조 간부 6명 중 5명은 징역 3∼15년을 선고받았다(나머지 1명은 무죄). 그들은 출옥한 뒤 복직은 아예 꿈조차 꿀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파면된 교사 1천5백명의 처지도 비슷했다. 교육부는 심사를 거쳐 이들 가운데 일부를 선별 복직시켰다. 그러나 사건이 터진 지 3년이 다 되도록 교사 4백여 명이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고 당시의 신문 기사(36쪽 사진 참조)에 적혀 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쫓겨난 교사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낙향해 농사를 짓는 사람, 생계 때문에 아내를 접대부로 내보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은 모두 복직했는데 교감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자신만 복직이 되지 않는다고 괴로워한 사람도 있었다.

강씨가 재심 청구에 나선 것은 이렇게 비참하게 스러져간 조합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교조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서이다.

강씨는 93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5·16은 군사 쿠데타’라고 규정한 직후 국회를 상대로 ‘5·16 진상 규명 특별조사위원회’ 구성을 청원하려고 했었다. 이때 지지 서명을 해준 여야 의원 34명 가운데 국민회의 정대철 의원(당시 민주당)은 청원 소개 의견서에서 ‘교조 사건이야말로 쿠데타 정권의 대표적인 용공 조작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그럼에도 청원은 결국 불발에 그쳤다. 전교조를 불법 단체로 규정한 정권이 교조 사건의 진상 규명에 나서기에는 애초부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교조 합법화로 상황은 바뀌었다. 단순한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이 아니라 ‘친일파·군사 쿠데타 세력이 오늘날까지도 득세하는’ 사회 구조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강씨는 외로운 싸움에 나설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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