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으로 번진 ‘5·18 불기소’ 규탄
  • 朴晟濬 기자 ()
  • 승인 1995.08.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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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문인 등 검찰 규탄 성명 잇달아…“역사 왜곡에 침묵할 수 없다”
5·18 관련자들을 불기소 처분한 검찰의 결정에 대해 각계의 비난 여론이 빗발치던 7월31일, 방학중이어서 조용하기만 하던 고려대 서울 캠퍼스의 교정 한쪽이 오후 들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이 대학 인촌기념관 강당에 교수 여러 사람과 언론사 기자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교수들은 이 날 짤막하지만 심각한 내용의 성명서 한편을 발표했다.

‘우리는 서울 지검과 고검의 5·18 수사 및 결정의 부당성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 결정은 우리 사회의 법과 정치와 도덕의 근본을 파괴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결정을 그대로 묵과하는 것은 역사적 과오를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므로 시정을 촉구한다.’ 고려대 전체 교수 8백여명 중 1백31명이 서명한 이 성명서는, 5·18 관련자들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내린 검찰측 처사를‘폭력과 살상을 수반한 초헌법적 집권 행위를 정당화했다’고 규정한 뒤, 바로 핵심으로 치고 들어갔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공소 시효에 적용 받지 않는 특별법을 제정하라’는 것이었다.

자칫 사회적 관심 영역에서 밀려날 기미마저 보이던 이른바 ‘5·18 관련자 처벌 문제’가 빠른 물살을 타고 있다. 문민 정부가 들어선 이후 좀처럼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던 지식인 사회가 마침내 이 문제에 대해 포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집단화 양상을 보이는 지식인 항의 대열의 맨 앞에 선 고려대 교수들은 87년‘호헌 철폐 투쟁’때에도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다.

고려대‘7·31 성명’의 최초 제안자들은 이름·소속·전공이 아직 정확하게 파악되지는 않았지만 이 대학에 재직하는 젊은 교수 5~6명인 것으로 알려진다. 7월22일과 28일, 서울 시내에서 학생·시민 수천 명이 참가한‘5·18 불기소 규탄 집회’가 대규모로 열렸는데도, 이같은 소식이 일반 시민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자 이들의 위기 의식은 즉각 행동으로 이어졌다. 더 늦기 전에 손쓰지 않으면 한국 현대사 최대의 과제인 5·18 문제가 흐지부지될 공산이 크다는 판단에 이른 것이다. 성명서 작성과 수정 작업, 동료 교수들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서명을 받아내는 작업이 마무리된 것은 행동을 개시한 지 나흘 만인 7월29일이었다. 교수들은 더 많은 동료 지식인들의 서명 참여를 기다릴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했다. ‘5·18 검찰 수사와 결정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이름의 성명서는 7월31일에 서둘러 발표됐다.

고려대 교수들 성명으로 파급

광주·전남 지역에서 교수들만의 집단화한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 때는 8월3일이다. ‘민주화를 위한 광주·전남 교수협의회’(광주전남민교협·회장 이종수 교수) 명의로, 역시 5·18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내용의 성명서가 발표된 것이다. 이 지역에서 교수들이 집단으로 성명서를 발표한 일은 87년 6월 항쟁 이후 8년 만에 처음이다.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던 참에 고려대 교수들의 성명이 이 지역 교수들의 행동에 불을 붙인 것이다. 교수들은 항의 성명서 이외에, 국토 종단 행진을 벌이다가 공소 시효 마감일인 8월15일에는 대전에 모여 대규모 집회를 연다는 구체적인 행동 계획도 발표했다.

지식인 집단의 또 다른 축인 작가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김정한 고 은 김규동 최일남 송기숙 이오덕 백낙청 신경림 박완서 등 진보적 문인 세력을 대표하는 민족문학작가회의(작가회의) 회원들은 8월3일 성명서를 내고, 5·18 관련자에 대한 검찰의 불기소 처분을 규탄하고 나섰다. 이 대열에는 소속 작가 6백41명이 참여했다. 작가회의는‘김영삼 정권은 이번 결정을 계기로 스스로 자기를 부정하는 행위를 저지르고 말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최근 열기로 보아 지식인들의 항의 움직임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광주·전남 지역의 경우 이미 조선대·전남대·목포대·순천대·광주대가 광주전남민교협과는 별도로 서명 작업을 시작했다. 서울과 부산에서도 몇몇 사립 대학을 중심으로 교수들의 성명서 작성 작업이 진행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8월4일에는 경북대와 한신대에서도 성명이 나왔다. 민교협 부산·경남 지회 의장 문현병 교수(부산여대·철학)는 “많은 교수가 항의 성명에 긍정한다. 앞으로 민교협이라는 특정 단체의 틀에서 벗어나 각 대학 교수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의사를 결집하게 될 것이다”라고 내다본다.

교수·문인의 움직임이 주목되는 까닭은 이들이 양심 세력으로서 사회에 갖는 일정한 영향력 때문이다. 더욱이 항거를 위한 특별한 무기로 이들은‘역사 의식’을 내세우고 있다. 고려대 7·31 선언에서 중추 역할을 했던 이 대학 이상신 교수(사학과)는 “만약 이번에도 침묵한다면 지식인 모두 ‘역사 왜곡의 공범자’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이번에 성명을 발표한 까닭도 바로 역사에 대한 책임 의식 때문이며, 다른 대학 교수들의 뜻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또 하나 지식인 성명 사태에서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지식인들이 5·18 문제에 대한 유력한 해법으로 공소 시효 연장·특별검사제·특별재판부 구성을 골자로 하는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여 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참여연대) 등 몇몇 시민 단체는 특별법의 내용을 검토하고 있으며, 이미 국회에 입법 청원서도 내놓은 상태다(상자 기사 참조). 이렇게 볼 때, 5·18 관련자 처리 문제에 대한 지식인들의 대응 양상은 검찰에 대한 ‘기소 촉구 투쟁’에서 김영삼 정부에 대한 ‘특별법 제정 촉구 투쟁’으로 옮아갈 것이 틀림 없어 보인다.

정부의 해법은 법적 심판은 보류한 채 역사적 심판에 맡긴다는 것이다. 그 해법을 수정하지 않는 한 지식인들의 ‘역사 문제 정답 쓰기 작업’은 더 광범위하고 강도 높게 진행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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