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난 '有錢釋放 · 無錢拘束' 망령
  • 權銀重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00.06.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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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범 변인호 해외 탈주 방치한 법원 · 검찰에 비난 쏟아져

살인범 신창원은 탈옥하기 위해 몇달간 살을 빼 뼈만 남은 몸으로 교도소 쇠창살 사이로 빠져나왔다. 대도 조세형은 법원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대기하다가 수갑을 찬 채로 대기실 창문을 넘어 도망쳤다. 지난 2월 광주법원에서 교도관을 찌르고 탈출했던 정필호는 감방 창틀을 끊어 오랫동안 바닥에 갈아 26㎝짜리 칼 3개를 만들었다. 이들의 탈출과 도피 과정은 영화처럼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이들은 법망의 허점을 이용해 유유히 검찰과 법원을 속이고 외국으로 탈출한 변인호씨에 비하면 한 수 아래다. 변씨의 탈주극은 지난 6월4일 서울지검 특수1부가 변씨의 누나 변옥현씨와 변씨의 변호사 하 아무개씨를 구속 기소해 전모가 드러났다. 신창원처럼 드라마틱한 탈옥과 도피 과정이 없어 일반인의 관심을 덜 끌었지만, 법 집행을 담당하는 법조인이 받은 충격은 컸다. 법을 잘 아는 변호사와 짜고 허점을 파고든다면 법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현 사법 제도에서 또다시 변씨 같은 인물이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허술한 법망 보란 듯이 유린

변씨는 탈출뿐 아니라 사기에도 천재적인 소질을 보였다. (주)중원 대표였던 변씨는 1996년 유령 회사를 차려 국내 8개 은행과 해외 은행으로부터 수출입대금을 타내고 어음을 할인해 주겠다며 경영이 어려운 기업체들을 속여 3천7백억원을 가로챘다.

변씨는 전문 사기꾼답게 법원도 ‘가지고’ 놀았다. 변씨는 1998년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2심 재판 도중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나오자 위조 여권을 들고 중국으로 도주했다. 변씨를 도주시키기 위해 가족을 포함해서 변호사·교도소 의무관·경찰관·교정공무원 등 법을 집행하는 공인들이 변씨 돈을 ‘먹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영화 같은 탈주가 가능하다는 것과, 우리 사회의 도덕적 해이가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주었다.

변씨가 탈출하는 데 가장 크게 공을 세운 사람이 변호사 하 아무개씨였다는 점이 사건의 파장을 더욱 키우고 있다. 하씨는 1998년 9월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변씨의 동료 재소자가 소개해 수임료 2억원을 받고 사건을 맡은 뒤 서울구치소 의무관과 구치소 교정공무원에게 각각 3천만원과 천만원을 건네며 변씨가 병원에 입원하도록 도와 달라고 직접 청탁했다. 결국 변씨는 1999년 1월 의무관의 허위 진단서를 내고 법원으로부터 구속집행정지 처분을 받아 한양대병원에 입원했다.

변씨는 한양대병원에서 2심 변호인이 고용한 사설 경호원 송 아무개씨를 백만원에 매수해 병실을 탈출한 뒤 누나 변옥현씨가 여행사 대표인 김춘자씨에게 천만원을 주고 만든 위조 여권을 가지고 6월26일 배를 타고 중국으로 달아났다. 변씨는 탈주한 후에도 법망의 허술함을 비웃듯이 위성 전화기를 이용해 하수인을 시켜 국내에서 두 차례나 금융 사기극을 벌여 64억원을 가로챘으며, 한 차례 밀입국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변호사의 책임이 크지만 법원과 검찰도 비난을 면하기는 어렵다. 법원은 변씨의 진단서만을 보고 구속집행정지를 명했고, 검찰은 이에 동의한 데다 그의 출국을 막지 못했다. 구속집행정지 결정이 내려진 데는 변씨의 2심 변호를 맡은 이 아무개 변호사와 주임 판사인 박 아무개 판사가 광주일고 선후배와 연수원 동기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으리라는 후문이다. 변호사측은 판사를 설득하기 위해 사설 경호원까지 동원해 변씨를 감시했다.

그러나 검찰과 법원은 모두 책임이 없다는 입장이다. 한 부장검사는 “변호사와 의사는 국가의 자격시험에 의해 검증된 공인이다. 그들이 만들어 오는 서류를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수사와 재판을 진행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대법원의 한 관계자도 “위급한 상황을 방치해 혹시 사람이 죽기라도 하면 모든 책임은 법원이 지는 데다 인원이 모자라 정밀하게 조사하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서울지검의 한 검사는 “재판이 진행 중일 때 피고의 모든 신병은 법원이 관리한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일부 인권운동가와 진보적인 변호사들은 이 사건이 복잡한 듯 보이지만 거기에는 ‘유전 석방, 무전 구속’이라는 뿌리 깊은 구태가 작용했을 뿐이라고 해석한다. 한 변호사는 “사회에서 힘 좀 쓴다는 사람이 일단 구속되면 가족이 변호사를 찾아가 돈을 쓸 테니 구속을 풀어 달라고 청탁하는 일이 많다”라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전관 예우를 받을 수 있는 변호사를 찾아간다고 한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구속되면 차선으로 구속집행정지나 보석 결정을 받으려고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한다. 따라서 이런 제도들은 있는 자들에 의해 오래 전부터 악용되어 왔다. 김현철·권노갑 씨나 박갑철 <조선일보> 전문위원,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 등 정·재계의 실력자들이 죄를 저지르고도 지병 등을 이유로 구속집행정지나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이들 가운데 중병에 걸린 사람은 없었다. 힘 있는 사람들이 큰 죄를 저지르고도 너무 쉽게 빠져 나오기 때문에 법 적용이 불합리하다는 비난이 거세다.

한 인권변호사는 “형사소송법을 보면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 판사가 구속집행정지를 판단할 수 있다’고 되어 있어 판사가 얼마든지 자의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법 조항을 아주 구체적으로 개정해서 돈과 권력이 개입할 여지를 차단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하태훈 교수(고려대·법학)는 “법의 문제라기보다는 법을 집행하는 법조인의 문제다. 이들이 위법 행위를 하면 영구 제명 같은 강도 높은 징계를 해야만 법조 비리를 근절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검사들은 좀더 엄격하게 구속집행정지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젊은 검사일수록 변호사와 법원에 대한 불만이 높았다. 5년 경력인 한 검사는 “죄질이 나쁜 피의자를 변호사가 법원에 손을 써서 불구속시키거나 형량을 낮출 때 무력감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반대로 변호사들은 결국 검사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검사가 구속 권한을 갖고 있고, 보석과 구속집행정지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 검사들이 구속 수사를 지나치게 선호한다는 것도 문제라고 한다. 대법원 조사에 따르면 1999년 구속영장 발부율이 86.3%(가집계)이고 1998년 형사 공판 가운데 구속 수사율이 56.7%로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법원이 이런 검찰의 관행에 제동을 걸기 위해 만든 것이 영장실질심사제도이다.

있는 사람만 아프다?

영장실질심사제도는 검찰의 구속 수사 남용을 막기 위해 1997년 1월에 시행되었지만, 검찰이 반발하자 판사가 직권으로 실시할 수 있던 것을 피의자 신청이 있을 때만 가능하도록 같은 해 11월 재개정했다. 경찰과 검찰은 수사하기도 바쁜데 피의자를 법원으로 호송해서 심사를 받고 영장을 발부받아 수사하는 것이 귀찮을 수밖에 없다.

구속은 피의자가 증거 인멸과 도주할 우려가 있을 때 수사나 재판 진행을 위해 예외적으로 인정되는 신병 확보 방법인데, 구속이 남발되어 ‘구속이 곧 처벌’이라는 인식을 일반인에게 심어 주었다. 따라서 죄가 있으면 구속해 벌해야 한다는 응징주의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이런 상황에서 기결수는 물론 미결수의 인권이 심각하게 침해될 수밖에 없다. 수사 과정에서 가혹 행위를 당해도 피의자와 그 가족들은 ‘죄인이니까’라고 체념해 버린다는 것이다.

여기에 정면으로 제동을 건 사람이 서준식씨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서씨가 1998년 1월 검찰과 법원 조사 대기 과정에서 하루 종일 수갑을 찬 채로 있어야 하고 재판정에서 죄인처럼 수의를 착용하는 것이 옳지 않다며 미결수 처우에 관한 헌법소원을 냈는데, 헌재와 법무부에서 각각 받아들여져 시정되었다. 인권운동가들은 이런 끔찍한 인권 침해가 자행되는 현실에서 돈을 쓰고 선을 대며 구속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꼬집었다.

한 인권 변호사는 “불구속과 무죄추정 원칙이 헌법에 보장된 만큼 불구속 재판을 의무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이를 위해 불구속 수사를 평등하게 적용하고 불구속 피고인의 실형을 집행할 제도적 장치가 무엇보다도 필요하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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