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급심 '반란'으로 국가안보법 위기
  • 김 당 기자 ()
  • 승인 1995.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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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급심, 국가보안법 위반 기소자 무죄 석방 잇달아…대법원 벽도 뚫을까 관심
“북은 남을 고무·찬양할수록, 남은 북을 고무·찬양할수록 통일이 빨라진다.”(고 문익환 목사의 방북사건 법정 진술)

국가보안법이 대한민국 법률 제10호로 제정되어 공포·시행된 때는 48년 12월1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넉달도 채 되지 않은 때이고, 한 국가의 기본 형사법인 형법이 제정된 53년보다 5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문제는 이른바 여수·순천 사건을 진압한 뒤 남로당 지하 세력을 파괴할 목적으로 제정한 이 법이 남로당 세력이 궤멸되고 난 뒤에도 오히려 강화된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최초로 국가보안법의 모든 것을 해부한 <국가보안법 연구>(전 3권)의 필자 박원순 변호사에 따르면, 58년 12월24일 국회를 통과한 이른바 ‘보안법 파동’의 3차 개정법이 그러했고, 60년 5·16 후의 반공법 제정이 그러했으며, 80년 12월31일의 국가보위입법회의에 의한 국가보안법 개정(반공법 흡수통합)이 그러했다.

그 증거는 처음 제정 당시 단 4개로 출발한 이 법의 죄와 형벌 조항이 40여 개로 늘어나고, 법정 최고형이 무기징역이던 것이 사형이 가능한 조항만도 수십 개로 늘어난 데서 찾을 수 있다. ‘반란’이 진압되고 ‘비상 사태’가 진정되고 남파 간첩 숫자가 줄었는데도 국가보안법은 점점 강화되고 확대되어 왔다. 91년 여당이 날치기 통과시켜 마지막으로 일부 개정된 때를 제외하고 국가보안법은 늘 국가 안보가 아닌 정권 안보를 위해 몸집을 불려온 것이다.

바로 그 거대한 국가보안법이 지금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국가보안법의 꽃’이라고 불리는 이 법 제7조(찬양·고무)가 처한 운명을 두고 재야와 법조계 일부에서는 이를 ‘내란’과 ‘외환’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회창·변정수의 소수·반대 의견 인용

국가보안법에 대한 일반적 분석에 따르면, 이 법의 대표적 모순은 위헌성(헌법)·상충성(남북교류협력법)·중복성(형법)이다. 특히 이 법의 처벌 조항들은 형법의 많은 처벌 조항과 중복된다. 그런데도 유일하게 국가보안법에만 있고 다른 형사처벌 법규에서 규제되지 않는 행위를 규정하는 조항이 있다. 제7조의 찬양·고무·동조죄가 바로 그것이다. 박원순 변호사는 이 조항이야말로 가장 독소적이자 가장 심각하게 남용된 조항이라고 지적한다. 이 조항은 헌법상 보장된 양심의 자유와 언론·출판·학문·예술 등 표현의 자유를 정면으로 침해하는 것으로서, 국가의 안보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민주주의를 질식시키는 조항이다.

바로 이 조항이 ‘법원의 반란’과 유엔 인권위원회 ‘의사 표현의 자유에 관한 특별보고관’의 방한 조사 및 국가보안법 국제 심포지엄 개최(41쪽 기사 참조)라는 내우외환을 맞고 있는 것이다.

목요집회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상임의장 안옥희)가 2년 전부터 목요일마다 서울 탑골공원에서 벌여온 ‘양심수 석방을 위한 거리 캠페인’이다. 그 중에서도 4월27일(84회)과 5월4일(85회) 열린 목요집회의 주제는 국가보안법 철폐로 모아졌다. 그리고 이 날 집회 참석자들은 어느 때보다도 고무되어 있었다. 최근 국가보안법 7조 위반자에 대한 하급 법원의 잇단 무죄 판결 때문이었다. 매번 이 집회를 준비해온 민가협 남규선 총무는 이를 ‘법원의 반란’이라고 표현했다. 국가보안법, 그 중에서도 특히 7조에 대한 법원의 최근 해석을 보안법의 존재 근거를 뒤흔드는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법조계에서는 대체로 ‘반란’이라는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직은 ‘기대 섞인 성급한 해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의 판결은 숱하게 많은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가운데 일부일 뿐인 데다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남겨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동안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의 경우 거의 무조건 유죄를 선고해온 법원이 적용 조항에 위헌 소지가 있다며 직권으로 위헌심판 제청을 신청하거나 무죄로 판결한 것은 이례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하급 법원의 이같은 결정은 국가보안법과 관련한 최고 법원(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소수 의견(또는 반대 의견)을 과감하게 인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급심의 결정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만하다. 이는 결국 상급심에게 판례(결정례) 변경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이씨 사건에서 재판부가 검찰이 제시한 혐의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무죄 판결을 내린 점이 관심을 끈다. 지난해에도 대법원은 같은 법 7조 5항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된 전대협 태재준 의장에게 원심대로 유죄를 확정한 바 있다. 즉 여태까지의 대법원 판례는 혐의 사실이 인정될 때 이를 유죄로 보는 것인데, 하급심에서 이를 알면서도 무죄를 선언한 것은 새로운 해석에 의한 대법원 판례에 도전하는 셈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같은 해석 원칙의 근거로 위의 위헌심판 결정(89헌가113호)과 대법원 판결(92.3.31. 90도2033호)을 들었다.

박씨 사건에서도 재판부는 이 사건 표현물들의 이적성 여부에 대한 판단에서 ‘김일성을 위대한 수령으로 표현하면서 김일성 개인을 찬양·미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들 내용은 소설의 진행 과정에서 등장 인물들의 성격 묘사와 사건 전개 등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삽입된 단편들일 뿐으로서, 그 내용이 전체적으로 대한민국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할 만한 구체적이고도 명백한 위험성이 있는 것이라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흥미로운 것은 재판부가 피고인의 이적 목적 여부에 대한 판단에서 ‘북한체제와 김일성에 대한 일방적이고도 무분별한 찬양 미화가 우리 국민들에 대하여 선전·선동적인 효과를 야기하지 못하고 오히려 반민주적 유일체제에 대한 강한 거부감과 혐오감을 유발해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체제의 우월성을 확신케 하는 데 기여해 오고 있는 점 등에 비추어도 이적 목적이 있었다고 인정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지적한 대목이다.

한편 두 판결이 모두 92년 3월 국가보안법 표현물 범죄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소수 의견을 낸 이회창 전 대법관의 견해를 상당 부분 인용함으로써 다수 의견(대법원 판례)에 도전하는 대목도 눈길을 끈다.

‘국가보안법의 표현물 범죄에서 위법성이 인정되려면, 대한민국의 존립과 헌법 기본질서의 폐지 내지 전복을 선동하는 취지가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나타나야 한다.’

“법원의 고민 반영한 대표적 판결”

‘이적 목적은 고의와는 별도로 요구되는 초과주관적 구성요소로서 행위 객체인 표현물이 이적성을 담고 있다는 인식 외에 반국가단체 등의 이익이 되게 할 이적 행위를 함에 대한 의욕 내지 인식까지도 필요로 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이같은 견해는 기존 대법원 판례와 상당 부분 배치하는 것이다. 다수 의견은 ‘대한민국의 안전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표현’을 이적표현물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적행위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의욕이나 확정적 인식까지는 필요 없고 반국가단체에 이롭다는 미필적 인식만 있으면 구성요건이 충족’되고, 이적 목적에 대해서도 ‘표현물 내용이 이적성을 담고 있는 것임을 인식하고 이를 제작·배포·소지하는 행위가 이적 행위가 될지도 모른다는 미필적 인식이 있으면’ 구성요건이 성립한다고 못박고 있다. 반면에 이회창씨는 소수 의견에서 ‘고무·찬양죄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이적행위가 나타나야 적용할 수 있다. 특히 소지죄의 경우에는 검사가 피고인에 대해 이적 행위에 대한 뚜렷한 의욕이나 확실한 인식이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입증해야만 처벌할 수 있다’고 무죄 의견을 제시했다.

그런 점에서 법조계에서는 최근 하급심에서 상급심에 던지고 있는 도전과 반란의 조짐은 이회창 전 대법관과 변정수 전 헌법재판관이 뿌린 씨앗이 싹을 틔운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창복 의장의 변론을 맡은 이덕우 변호사는 “90년대 들어 하급심에서는 국가보안법 7조 위반 혐의에 대해 범죄로서 처벌할 가치가 있는지 고민해 왔다. 전과 달리 조직 사건을 제외하고는 실형 선고도 거의 없어졌다. 이번 판결은 그동안의 법원의 고민을 반영한 대표적 판결인 셈이다”라고 말했다. 이 반란의 싹이 대법원 판례의 철벽을 뚫을 수 있을 것인가.
‘반란’ 조짐은 정초부터 나타났다. 지난 1월17일 부산지법 제3형사부(당시 재판장 박태범 부장판사)가 직권으로 국가보안법 제7조 1·3·5항에 대한 위헌심판 제청을 결정한 것이다. 당시 재판부는 ‘국제사회주의자들’(IS)에 가입해 활동하다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된 대우정밀 노조 여성부장 정은경씨(25)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정씨 등 4명을 직권보석으로 석방하면서, 헌법재판소의 한정합헌 결정(90.4.2. 89헌가113결정)에 따라 91년 개정된 국가보안법 제7조 1·3·5항이 위헌 소지가 있다며 직권으로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을 제청했다.

우선 법률적인 측면에서, 재판부는 91년 개정된 국가보안법이 헌법재판소가 한정합헌 결정을 내린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고 전제하고, 따라서 사건에 적용된 개정 조항들이 ‘헌법의 죄형법정주의와 표현의 자유의 우월적 보장, 기본권의 본질적 침해 금지규정 등에 합치하지 않는다는 의심이 있다’고 위헌심판을 제청한 이유를 밝혔다. 재판부는 이렇게 판단한 근거로 ‘사상의 자유경쟁’론을 거론했다. 특히 재판부가 결정문에서 사상의 경쟁이 자유민주주의의 유지와 발전에 필요 불가결한 요소임을 강조하고, 어떤 생각이나 표현 자체를 금기시함으로써 실제 이상으로 그것의 상징적 위험성을 강조하고 벌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정도가 아님을 역설한 다음과 같은 대목은 두고두고 인용될 만한 명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표현의 자유는 사상의 경쟁이 자유롭게 허용되는 사회에서만 건전하고 실질적으로 보전된다. 한 시대 또는 한 사회에서 기존의 진리와 가치는 사상의 자유경쟁과 도전을 거쳐 새로운 진리와 가치로 발전 또는 창조되어 나가는 것이고 우리는 이것을 역사의 발전 과정으로 인식한다. 이러한 새로운 진리와 가치의 발전과 창조는 때로는 기존의 진리와 가치를 부정하고 극복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기존의 사상 이념에 반한다 하여 무조건 배척하거나 억제할 것이 아니라, 무가치하고 유해한 사상과 이념이라도 가급적 자유 경쟁의 시장에서 비판되고 도태되는 과정을 거치게 함으로써 건전한 국가와 사회체제의 기초가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표현 내용이 우리에게 당혹스런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이러한 종류의 표현이 북한이 종전에 펴온 간접 침략정책에 의한 선전 내용과 흡사해 국가 안전보장을 이유로 철저하게 금기시해온 것이어서 내용의 실제적 위험성보다는 금기 표현물이 갖는 상징적 위험성이 더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나, 북한도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징적 위험성도 약하다 할 것이다. 또 피고인들의 사상과 표현물도 사상의 경쟁시장에 상장되면 허구성과

무가치한 실체가 드러나서 스스로 스러져버릴 표현물이라 할지라도 이를 금기시함으로써 상징적 위험성을 지니게 만든다.’

아울러 재판부는 ‘이 조항을 문리적으로 해석하면 기존의 체제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사상임을 인식하고 이를 표현하는 행위라면 처벌하도록 돼 있어 국민의 사상과 다양성을 사전에 봉쇄할 수 있다. 개정된 조항들이 헌법재판소의 결정 취지를 어느 정도 수용한 면은 있으나 여전히 구성원·활동·동조 등의 용어가 남아 있어 위헌 시비를 없애지 못하고 있고, ‘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라는 주관적 구성 요건의 해석 기준이 불명확해 자의적 적용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대법원 판례에 정면 도전

재판부의 이같은 결정은 국가보안법의 부분 개정(91년 5월31일)을 있게 한 헌법재판소의 한정합헌 결정(90년 4월2일)에 대한 사실상의 도전이자 결정례를 변경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당시 헌법재판소는 보안법 7조 1·5항에 대한 위헌심판 결정에서 ‘구성원·활동·동조 등의 용어가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적용 범위가 광범위해 문언을 그대로 해석 적용한다면 헌법상의 언론 출판 학문 예술의 자유 및 양심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고 위헌성을 지적하면서도 ‘소정의 행위가 국가의 존립 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위해를 줄 명백한 위험이 있을 경우에만 축소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헌법에 위반되지 아니한다’고 변형결정한 바 있다. 따라서 같은 조항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한정합헌 해석과 배치되는 재판부의 결정은, 당시 전면 위헌임을 주장한 헌법재판소 변정수 재판관의 반대의견을 인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의 헌재 재판부가 이 위헌심판 제청을 어떻게 처리할지 기대된다.

지난 4월 서울지법 항소심에서 이루어진 국가보안법 제7조 5항(이적표현물 제작·배포) 위반 사건 2건에 대한 무죄 판결 또한 또다른 ‘반란’의 조짐으로 해석될 만하다. 지난 4월6일 서울지법 형사항소1부(재판장 이신섭 부장판사)는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전국연합) 상임 공동의장 이창복씨에게 무죄를 선고해 석방했다. 이어 4월21일에는 같은 법원 형사항소3부(재판장 이우근 부장판사)가 출판인 박치관씨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창복 의장의 경우 지난해 범민족대회 개최 등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및 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돼 1심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았으나, 2심 재판부는 이 날 원심 판결을 깨고 국가보안법 위반 부분에 무죄를 선고해 석방했다. 또 박치관씨는 북한 소설 <용해공>을 출판해 같은 법조항 위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으나 이 날 항소심 재판부는 역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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