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를 심판대에 올려라"
  • 권은중 기자 (jungk@e-sisa.co.kr)
  • 승인 2000.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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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관 5명 임용 앞두고 자질 검증 움직임 ··· 시민단체 "부적격 인사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지난 6월28일 낙태 시술을 불법으로 규정한 네브래스카 주의 낙태금지법을 위헌이라고 판결했을 때 한국 언론은 이를 큼직하게 보도했다. 일부 신문은 이 기사를 1면에 실었고 ‘미국은 연방대법원이 지배한다’는 해설 기사를 싣기도 했다.

관련 기사는 우리 언론에 아직도 자주 등장한다. 미국 대선에서 고어와 부시가 각각 낙태가 위헌이라는 대법원 판결에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고어는 낙태를 찬성하고 부시는 낙태를 반대한다. 대법원이 이번 대선에 한 가지 쟁점을 던진 셈이다.

그러나 우리 언론은 정작 한국에서 위헌 법률을 심사하는 헌법재판소(헌재)에는 냉담하다. 오는 9월 말 헌법재판소 소장을 비롯해서 재판관 5명이 새롭게 임용되어 3기 헌재가 출범한다. 재판관 9명 중 위헌을 결정할 수 있는 과반수가 바뀌는 중요한 시점인데 이들을 임용하는 일에 언론이 너무 조용하다는 것이다.

조 국 교수(동국대·법학)는 “헌재는 분쟁의 마지막 단계인 법적 판단을 하는 중요한 국가기관인데, 대법관 임명 때보다 눈길을 끌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헌법 재판은 일반 재판과 달리 국가 질서와 직결되기 때문에 이런 무관심의 폐해는 의외로 클 수 있다는 것이다.
언론뿐만이 아니라 대다수 시민단체도 헌법재판소에 관심이 없다. 국가보안법을 반대해온 시민단체나 호주제 폐지를 외치는 여성단체도 새로 임명될 헌법재판관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헌재가 국가보안법 7조 찬양고무죄, 9조 불고지죄를 계속 합헌이라고 결정하고 있는데도 인권단체가 누가 재판관이 되는지 관심이 없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경실련과 참여연대는 8월 초부터 시민단체가 추천할 헌재 소장을 선정하기 위해 법대 교수와 변호사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한 관계자는 “시민단체가 추천한 헌재 소장 후보가 무게를 갖도록 교육·인권·노동·여성 각 분야 시민단체가 토론을 통해 2기 헌재 평가와 바람직한 3기 헌재 소장을 추천하려 했으나 준비된 시민단체가 거의 없어 무산되었다”라고 말했다.

경실련 시민입법국 고계현 국장은 “헌법과 국민 기본권을 수호한다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은 헌재의 영향력을 반증하는 것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즉 정치적으로 민감한 결정을 유보하거나 애매하게 결정한 2기 헌재가 무관심을 자초했다는 분석이다. 헌재가 무기력한 이유에 대해 한국공법학회와 법조계는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을 못하게 한 점이나 위헌 판단만 구속력을 갖게 한 헌재법 등 제도적인 제약 탓도 크다고 본다(46쪽 상자 기사 참조).

그러나 법조계와 시민단체는 헌재의 이런 문제가 일단은 헌법재판관 개인들에게 원인이 있다고 본다. 인사청문회나 내부 검증장치가 없어 함량 미달인 재판관이 임기 6년을 보장하는 헌재로 얼마든지 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헌재 소장과 주심 재판관이 위헌 법률을 바로잡겠다는 신념만 있다면 과거 독재 정권이 만들어 놓은 불법과 불법적 관행을 위헌이라고 소신껏 판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1기 헌법재판관으로 소수의견을 63개나 내놓아 법조계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던 변정수 전 재판관은 <재판관의 보람과 아쉬움>이라는 회고록에서 “주심 재판관의 역량이 절대적으로 크다”라고 말했다. 그는 위헌 법률 심사만큼 중요하고 헌재 접수 사건의 절반을 차지하는 검찰의 불기소처분 취소 결정을 6년 동안 단 한 번도 인정하지 않고 모두 기각한 재판관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따라서 이번 9월 초 실시되는 헌법재판관 인사청문회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시민단체의 판단이다.
시민 인사청문회 열 움직임

하지만 현재 국회법 제46조 3항에 의하면 헌법재판관 가운데 헌재 소장과 국회가 추천한 재판관 3명에 대해서만 인사청문회를 실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법대로라면 ‘반쪽 청문회’가 불가피하다. 대통령이나 대법원장이 추천하는 재판관 임용에는 국회의 동의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9월에 바뀌는 재판관 5명 가운데 3명만이 청문회를 거치게 된다.

헌법학자들은 국민이 선출한 국회에서 추천되는 재판관은 청문회를 하고 선출직이 아닌 대법관 추천자를 청문회에 세우지 않는 것은 절차적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경실련 이석연 사무총장은 “헌법재판관 모두를 청문회에 부를 수 있도록 국회법을 개정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조순형 의원은 “여야가 졸속 개정을 하다가 이 부분을 간과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관련법을 놓고 여야는 지난 6월 인사청문회 대상 기관에 국정원장·국세청장을 포함해야 한다는 문제를 놓고 대립하다가 이한동 총리 청문회를 앞두고 급하게 처리했다.

이제 헌재 재판관 인사청문회가 반쪽으로 치러지리라는 것이 확실하다. 게다가 여야가 서로 국회 추천권을 갖겠다고 다투고 있다. 따라서 누가 재판관으로 추천될지 아직도 오리무중이어서 반쪽 청문회마저도 졸속으로 진행될 확률이 매우 높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시민단체들은 청문회 전에 국회법을 개정할 시간 여유가 없기 때문에 대법원 규칙이나 대통령령에 의해서라도 자체 청문회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이 받아들여질 확률은 거의 없다. 경실련과 참여연대는 설문조사가 끝나는 대로 신임 재판관에 대한 의견서를 내놓고 8월 말 시민 인사청문회를 열 계획이다. 임명자가 참석하지 않아도 그대로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청문회 대상인 헌재 소장으로는 이용훈·천경송 전 대법관이 거론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법적 식견이나 친화력에서 높은 점수를 얻고 있다. 특히 이씨는 법원행정처 차장과 사법제도발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해 제도 개선이 필요한 헌재 소장으로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지만 시민단체가 주목하고 있는 사람은 헌재 소장이 아니다. 청문회 대상이 아닌 검찰 추천 몫으로 이미 내정되어 대통령의 지명을 기다리고 있는 송인준 전 대구고검장이다. 송씨는 대전지검장으로 있을 때 옥천 조폐창 파업유도 사건과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파업유도 특검 때 소환되기도 했다. 또 재직 중에 이미 자신의 업적 보고서를 준비하다 구설에 올랐던 사람이다. 이런 이유로 송씨에 대해 시민단체가 가장 집중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것으로 보인다.

학계는 이미 2기 재판부가 출범했던 1994년에도 인사청문회를 정착시키고 대통령과 대법원장의 추천권을 국회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법대 교수는 “6년 전에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지만 하나도 고쳐진 것이 없다”라고 말했다. 경실련 관계자는 “다행히 여야가 헌재 청문회가 잘못 되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어 법 개정이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하지만 청문회법 개정이 사법부와 대통령의 인사권을 침해해 위헌 소지가 있다는 해석도 있어 청문회 관련 국회법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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