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 전과자들이 뭉쳤다
  • 김 당 기자 ()
  • 승인 1995.08.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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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국가보안법 피해자 대회’ 열려… 4백여 명 모여 법 철폐 운동 다짐
광복 50주년이라는 짧은 현대사에서 우리나라만큼 굴곡 많은 ‘정치적 세대’를 가진 나라도 드물 것이다. 이른바 ‘4·19 세대’ ‘6·3 세대’ ‘민청학련 세대’ 등에 이어 최근에는 ‘긴조(긴급조치 9호) 세대’까지 등장했다. 현대사 50년을 나무로 비유하자면, 하나같이 현대사의 굴곡에서 덧난 생채기들이 아물면서 생긴 ‘옹이’들이다. 그리고 이 옹이들은 공화국을 여섯 번 거치는 동안 한데 뭉쳐 정치 세력화하거나 혹은 복권되었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깊은 상처를 입거나 혹은 결딴난 세대이면서 아직 한 번도 모인 적이 없는 세대가 있다. 아니 이들에게는 세대라는 말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반국가’라는 공통점말고는, 이들을 세대로 묶기에는 너무 긴 세월 동안 박인 옹이들이기 때문이다. 전쟁 상처에서부터 조문 상처까지, 20대 새파란 옹이에서부터 80줄의 파파 옹이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불고지’ 옹이에서부터 ‘간첩’ 옹이까지 나이도 상흔도 저마다 다르다.

그런데 지난 47년 동안 한 번도 모인 적이 없는 국가보안법 ‘전과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거기에다 이 전과자들은 한데 뭉쳐 ‘국가보안법 없는 세상, 우리가 만듭시다’라고 한목소리를 냈다. 국가보안법 전과자들이 아직도 위세당당한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7월20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8·15 50주년 민족공동행사 남측준비위 산하 국가보안법 철폐대책위원회 등 4개 재야·인권 단체가 공동 주최한 ‘국가보안법 피해자 대회’가 그것이다.

“유엔에 인권 침해 제소하겠다”

이 날 기독교연합회관 3층 대강당에 모인 장기 복역 출소자 20여 명을 포함한 국보법 피해자 4백여 명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이 법으로 구속된 사람들의 명예 회복과 사면 복권을 주장했다. 이들은 또 ‘민족 분단의 걸림돌이며 인권 침해의 최대 주범’인 이 법을 폐지하는 데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아울러 이들은 유엔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일명 B규약)에 의거해, 자신들의 사상과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구속해온 국보법에 의한 인권 침해를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소하겠다고 밝혔다.

무엇이 이들을 뭉치게 했을까. 문민 정부 들어서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모순된 현실’이다. 민가협이 이 날 발표한 양심수 현황(6월10일 현재)에 따르면 현재 구속되어 있는 양심수는 4백64명이다. 이들을 적용 법규 별로 분류하면, 국가보안법 위반죄가 3백명으로 전체 양심수의 65%를 차지하고 있다. 이같은 국보법 구속 비율은 노태우 정부 시절의 국보법 구속 비율(33%)보다 32%나 더 높아진 것이다. 박원순 변호사는, 국보법과 관련해서는 문민 정부 들어서도 ‘법과 사람(공안직) 그리고 관행(수사 관행)’ 중에서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다고 지적했다. 박변호사는 바뀐 것이 있다면 김영삼 대통령의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3당 합당 이전 야당 총재 시절의 ‘폐지론’이 대통령이 된 뒤 ‘존속론’으로 180도 달라진 것을 빗댄 말이다.

이들을 뭉치게 한 것은 국보법을 둘러싼 국내외 상황의 변화이다. 유엔에 제소하기로 한 배경도 국보법에 대한 국제 사회의 주목과 유엔의 권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92년 7월 유엔 인권이사회는 국가보안법이 B규약 19조(표현의 자유) 등 제반 조약 규정을 심각하게 위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내에서 남과 북이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를 실천하는 데 가장 현실적인 걸림돌이 국가보안법이라는 인식이 커지고 있는 점도 중요한 상황 변화이다. 이같은 인식의 변화는 특히 올해 초부터 국보법 일부 조항(특히 제7조)에 대한 법원의 위헌 제청 결정과 국보법 피의자에 대한 무죄 석방 등의 전향적 조처가 잇따르고 있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피해자 대회가 열린 바로 다음날에도 서울지법 형사 항소6부(이흥구 판사)는 김일성의 전기 <세기와 더불어>를 팔다 국보법 위반 혐의로 긴급 구속된 한 서점 주인에 대한 구속영장을 ‘국민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가 침해될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기각했다. 이 날 주최측이 내건 ‘국가보안법 없는 세상, 이제 멀지 않았습니다’라는 슬로건이 과거의 공허한 외침에서 조금씩 현실적 힘을 얻고 있다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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