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살된 것도 인정 안하니…”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5.01.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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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사한 최종길 교수 유가족 “법원이 모든 책임을 우리에게 떠넘겼다”
“패소할 것 같다. 판결문에 아버지가 중앙정보부(중정)에서 타살 당했다는 것만이라도 명시되면 좋겠다.” 지난 1월25일 밤, ‘의문사 1호’인 최종길 교수의 아들 최광준 교수는 기자와 통화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1월26일 오전10시, 판결은 그의 예상에서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서울지법 23민사부(이혁우 부장판사)는 최광준 교수가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사인에 대한 판단도 유보했다. 비록 1심이지만, 3년에 걸친 소송에서 사실상 유가족이 패한 것이다.

최광준 교수는 패소 자체보다 어정쩡한 법원의 결정이 더 불만이다. 2002년 5월24일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는 최종길 교수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국가 공권력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발표했다. 1973년 최종길 교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실명까지 공개했다. 차철권·김상원은 폭행과 가혹행위·상해치상 경합범이고, 변영은은 고문에 가담해 폭행죄, 조일제·안경상·장송록·서철신·정낙중·권영진은 허위 공문서 작성죄에 해당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형사소송법상 공소 시효(15년)가 지나, 의문사위는 고발과 수사 의뢰를 하지 않았다.

‘간첩 교수’라는 누명이 30년 만에 풀렸지만, 정부는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중앙정보부 후신인 국가정보원마저 유감만 표명하고 사인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했다. 그러자 유가족은 민사 소송을 통한 명예회복으로 방향을 틀었다. 재판 과정에서 전 중정 공작과장 안 아무개씨(76)가 법정에 나와 최종길 교수가 고문을 당해 타살되었다고 증언했다.

법원, 검찰의 책임 방기는 외면

그런데도 재판부는 사인에 대한 판단을 또다시 유보하고 시효 문제만 따졌다. 재판부는 박정희 정권이 집권한 1979년까지는 소송이 불가능한 객관적인 장애 사유가 있었다고 하지만, 1988년 10월6일 천주교인권위원회가 검찰에 진정을 낸 시점부터는 시효가 시작된 것으로 보았다. 그때부터는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는데 유가족이 손을 놓고 있었다며 청구를 기각했다. 현행 민법상 손해배상청구 시효는 5년이다. 이에 대해 최광준 교수는 “입법부·사법부·행정부가 모두 손을 놓고 있다가, 유가족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판결이다”라고 말했다.
이유는 이렇다. 1988년 10월6일 천주교인권위원회는 검찰에 진정을 냈다. 형사소송법상 공소 시효 완성을 눈앞에 두고서다. 진정서에는 고문과 관련된 22명의 이름과 직책까지 밝혔다. 당시 검찰은 불과 열흘 남짓 조사하고, ‘중정 관계자 10여 명을 불러 조사했지만 형사 고발할 증거 또는 단서를 찾지 못했다’며 기소조차 하지 않았다. “1988년 국가기관인 검찰이 증거가 없다며 종결했는데, 개인이나 다름없는 유가족이 무엇을 근거로 민사 소송을 내겠느냐. 만약 그때 22명을 상대로 민사 소송을 냈다면 거꾸로 무고죄에 걸렸을 것이다”라고 최교수는 항변한다.

그때 수사만 제대로 했다면 진실은 밝혀졌을 것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관련자들 이름이 1988년 낸 진정서에 그대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민사 소송도 진행했을 것이다. 이번 판결은 검찰의 책임 방기라는 숲은 보지 못하고, 시효 문제라는 나무만 본 것이다.

1심에서는 패했지만, 승산은 남아 있다. 국회가 반인권적인 국가 범죄 공소 시효에 대한 특별법을 만들면 된다. 지난 1월27일 열린우리당 이원영 의원은 최광준 교수와 기자회견을 갖고, 특별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의원이 준비하는 법안에는 반인권적 국가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 시효를 배제하고, 법 시행 이전에 시효가 완성된 국가 손해배상청구에 대해서는 소멸 시효 완성을 국가가 주장할 수 없도록 못박았다. 이 날 최광준 교수는 기자와 통화하면서 “입법 여부와 상관없이 대법원까지 가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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