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단층선’에 패권 전쟁 ‘활활’
  • 모스크바·정다원 통신원 ()
  • 승인 2003.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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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러시아, 중앙아시아·카프카스 지역 이권 싸고 ‘으르렁’…독립국가연합 입장은 제각각
러시아 남쪽 중앙아시아와 카프카스 지역의 군사 정세가 복잡해지고 있다. 지난 7월 초 미군과 나토군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군사 작전을 재개했고, 독일에 주둔하던 미군은 중앙아시아와 카프카스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러시아도 이에 대응해 곳곳에서 병력을 증강하고 있다. 백악관과 크렘린 간의 갈등이 키르기스스탄과 중국 사이 국경에서 흑해에 이르기까지 총 3천2백㎞에 달하는 이른바 이슬람 단층선을 따라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7월4일 미군은 아프가니스탄 동남쪽 파키스탄 경계 지역인 호스트와 팍티야 산악 지대에서 군사 작전을 재개했다.

지난해 ‘아나콘다’ 작전을 종료한 이후 19개월 만에 재개된 이번 작전은, 퇴출된 이슬람 극단주의 탈레반 정권과 국제 테러 조직 알 카에다 잔당 섬멸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여기에는 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던 미군 특전사 병력과 나토 소속 이탈리아군이 투입되었다. 나토군은 아프가니스탄 치안 유지도 떠맡을 예정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난 뒤 아프가니스탄 내부는 무법 천지가 되었다. 산악 동굴 지대에 은신한 탈레반과 알 카에다 잔당들은 정부군과 다국적 평화유지군을 기습 공격해 괴롭히는가 하면, 지방 군벌들도 세력 다툼이 한창이다. 이같은 ‘춘추전국 시대’를 맞아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작물인 양귀비(마약 원료) 재배가 호황을 누리고 있고, 카르자이 대통령은 수도 카불의 대통령에 불과하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다.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작전 재개와 나토군의 치안 임무 인수가 갖는 전략적 의미는 중요하다. 때마침 미국 대외정치위원회 정치국 부국장인 일란 버만이 7월 초 <월 스트리트 저널>에 눈길을 끌 만한 글을 기고했다. 버만 부국장은 ‘서방이 잠자고 있는 동안 중앙아시아는 조용히 러시아 궤도로 잠입했다’고 경고했다. 미국이 중동에서 이라크 전쟁을 수행하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 매달려 있는 사이에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는 논리였다.
버만이 주장한 대로 러시아는 이라크 전쟁의 틈새를 파고들었다. 이라크 전쟁이 끝난 직후인 지난 4월 말 타지키스탄 수도 두샨베에서는 아르메니아·벨로루시·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러시아·타지키스탄 대표들이 모여 집단안보조약기구(ODKB) 구축을 논의했다. 러시아가 이 회동을 주동했음은 물론이다.
이어 5월 말 상트페테르부르크 건립 300주년 기념일을 맞아 크렘린은 중국을 주축으로 한 상하이협력기구(SCO)를 집단 안보 체제로 전환하고, 독립국가연합 정상들과도 집단 방위 체제를 재차 논의했다. 한마디로 러시아는 옛 소련 영토에 대한 주도권을 절대로 미국에게 양보할 수 없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하지만 워싱턴의 대응 태세도 만만치 않다. 9·11 사태 이후 미군은 아프가니스탄과 인접한 중앙아시아 국가들로부터 군사 기지를 임차하는 데 성공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나면 철수하기로 합의했던 약속을 깨고 우즈베키스탄의 카르시와 키르기스스탄 수도 피슈페크 인근에 공군 기지를 확보하고 군대를 계속 주둔시키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의 ‘물밑 각축’은 이미 2001년 9·11 테러 때부터 이루어져왔다. 옛 소련 때부터 타지키스탄 수도 두샨베에 기동타격대를 주둔시키고 중앙아시아 전략을 수행해온 러시아는 9·11 사태가 터지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시작되자 이곳의 군사력을 대폭 강화했다. 또 키르기스스탄 수도 피슈페크 인근 칸트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옛 소련 때 사용하던 공군 기지를 빌려 현대화하고, 집단안보조약기구의 신속대응군 참모부를 운용하고 있다.

또한 러시아는 최근 주변국과 군사 협력도 강화했다. 카자흐스탄과 합동 군사 계획 협약을 체결한 것이 대표적이다. 카자흐스탄으로부터 임차한 바이코누르 우주 기지의 중요성도 간과할 수 없다. 군사 전문가들은 올 가을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공동으로 ‘남방 상호우호 방패’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군사 작전을 수행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중앙아시아에 대한 미국과 나토의 외교적·군사적 영향력 확장에 쐐기를 박자는 계산이다.

카스피 해와 흑해 사이에 위치한 남부 카프카스 지역에서도 미국과 러시아 사이의 긴장이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군수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그루지야로부터 헬리콥터 기지를 임차하는 데 성공했던 미국은 현재 그루지야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는 단계까지 양국 관계를 발전시켰다. 또 워싱턴은 친미 성향인 아제르바이잔에도 접근해 군사 기지 설립을 적극 추진하는 한편, 러시아의 주요 군사 거점인 아르메니아에까지 손을 뻗쳐 이곳에서 군사 훈련을 실시할 예정이다. 최근 독일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과 나토군이 카프카스 지역으로 대거 이동할 것이라는 소식도 들린다.

이에 뒤질세라 러시아는 기독교 국가인 아르메니아의 북서쪽 터키 국경 지대인 귀움리시 인근 산악 지대에 있는 방공 기지를 대폭 확충했다. 이곳에 최신예 대공 미사일 콤플렉스(ZRK S300)를 비롯한 각종 첨단 무기를 추가 배치하고, 그루지야에 주둔하는 병력 일부를 옮겨 군사력을 증강했다. 또 흑해 연안에 위치한 소치에서 그루지야의 트빌리시를 거쳐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까지 직통 기차 노선을 신설해 카프카스 통제력을 강화하고 있다. 카스피 해 함대 거점인 아스트라한 해군 기지를 강화하는 움직임도 주목할 만하다.

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 해 에너지 자원 이권을 보장받기 위해 미국을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현재 공사가 진행 중인 바쿠-트빌리시-세이한(터키) 송유관을 보호할 목적에서 뿐만 아니라 이란을 견제할 의도로 아제르바이잔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싶어한다. 그루지야는 부유하고 강력한 미국과 유럽을 끌어들여 경제도 살리면서 러시아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일석이조를 노리고 있다. 하지만 워싱턴의 1차적 관심은 송유관 보호에 있다.

9·11 사태 이후 밀월 관계로 들어섰던 러시아와 미국은 최근 카스피 해 이권을 놓고 불협화음을 노출해 서로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송유관 건설이 불씨가 되었다. 러시아는 카자흐스탄 악타우 유전의 풍부한 원유를 러시아를 통과하는 텐기즈-노보로시스크(흑해) 송유관과 연결할 것을 주장한다. 하지만 미국은 악타우-바쿠 해저 송유관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이 송유관과 바쿠-세이한 송유관을 연결하겠다는 구상이다. 즉 러시아를 배제하고 미군이 주둔하고 직접 관리할 수 있는 송유관을 통해 원유를 안전하게 확보하려는 것이 워싱턴의 의도인 셈이다.

송유관 건설을 둘러싼 갈등의 불씨는 투르크메니아에도 남아 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미국과 유럽은 투르크메니아로부터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거쳐 인도에 이르는 송유관과, 아울러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파키스탄의 인도양까지 송유관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러시아는 이에 대해 투르크메니아 원유를 이란을 통해 페르시아 만으로 빼는 방안을 제안했다.

9·11 사태로 촉발된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새롭게 점화된 미국과 러시아의 줄다리기 속에서 중앙아시아와 카프카스 지역 국가들은 전기를 맞았다. 소련이 해체된 이후 빈곤의 늪에서 허덕이는 이들은 자신들의 에너지 자원을 발판으로 서방의 지원을 받아 발전과 번영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연고권을 주장하고 있다. 희망과 불안의 길목에 선 이 국가들 중 그루지야·아제르바이잔·우즈베키스탄은 친서방 정책을 선호하는 반면, 타지키스탄과 아르메니아는 러시아에 밀착하고 있고, 카자흐스탄·투르크메니아·키르기스스탄은 양다리를 걸쳐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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