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젊은이들 '마약 먹고 맴맴'
  • 모스크바/정다원 (dwj@sisapress.com)
  • 승인 2003.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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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도시 시민 8.5% ‘중독’…복용자 85%가 미성년자
러시아가 ‘마약 공화국’이 될 날도 멀지 않은 듯하다. 정부의 강력한 단속과 퇴치 운동을 비웃기라도 하듯 마약 유통량이 하루가 다르게 늘고, 거래도 도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마약은 중·고등학교나 대학가는 말할 것도 없고, 연방안전국(FSB)·경찰국·크렘린·두마(하원) 등 정부 기관 주변, 심지어 약국에서조차 공공연하게 거래된다. 마약은 현재 러시아 최대의 사회악이다.

러시아의 마약 실태는 심각하다. 올해 러시아 내무부가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사법 당국에 압수된 마약은 1996년(44t) 이래 매년 증가 추세를 보여 2002년에는 1백17t에 이르렀다. 특히 2001년에서 2002년 사이에는 35t이나 늘어 폭증세를 보였다. 일명 ‘백색 가루’로 통하는 헤로인은 러시아의 스베르들로프스카야 지역에서만 연간 14t 정도 유통되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다른 지역도 비슷한 수준일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덧붙인다.


러시아 학술원 산하 사회학연구소의 마약 전문가 마이야 미하일로브나는 세간에 알려진 시민들의 마약 복용 실태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녀가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페테르부르그 시민 가운데 8.5%가 ‘치료 목적 이외’로 마약을 복용하고 있다. 이를 인구 수로 환산하면 시민 약 40만명이 헤로인을 복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이 하루에 소비하는 마약은 모두 40㎏. 연간 14t 정도가 페테르부르그 시에서 소비되는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전체 마약 복용자의 85%가 14~17세의 미성년자라는 사실에 있다. 이같은 사정은 모스크바·크라스노다르·칼리닌그라드 등 주요 도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중·고등학교와 대학가에는 조직적인 마약 유통망이 구축되어 있어 청소년들은 손쉽게 마약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이들은 은어를 사용하며 은밀하게 마약을 거래한다. 이른바 알약으로 정제된 마약은 ‘콜레사(바퀴)’라고 부르며, 돈은 ‘라베’라고 한다. 마이야 미하일로브나는 “5년 전까지만 해도 집에서 만들어 팔던 ‘오피아트’라는 조잡한 검은색 마약이 유행했다. 이 약물은 거래가 별로 신통치 않았다. 그런데 백색 헤로인이 나오면서 마약 수요가 급증했다”라고 주장한다.

요즘 모스크바 시민들에게 ‘루뱐카’라는 단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원래 루뱐카는 옛 소련의 국가보안국(KGB)과 그 후신인 연방안전국이 있는 광장 이름으로 정보국의 섬뜩한 이미지를 표현할 때 쓰는 용어였다. 현재 이 용어는 마약 거래소를 의미하는 은어로 사용된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연방안전국 바로 옆에서 마약이 공공연히 거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무엇을 찾으세요’라고 묻는 말은 마약 거래를 트자는 암호로 통한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러시아 마약 단속 당국은 바짝 정신을 차렸다. 국립마약통제위원회 부위원장인 알렉산드르 미하일로프 장군은 “현재 루뱐카 주변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 24시간 마약 사범을 감시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그가 밝힌 내용 중 충격적인 사실이 하나 있다. 한번은 신고를 받은 경찰이 루뱐카를 급습해 마약 사범 80명을 체포한 적이 있었는데, 그 중 상당수가 경찰이나 공무원 출신이었다. 항간에 떠돌던 ‘거리의 마약 장사는 경찰 몫이다’라는 소문이 사실로 입증된 사건이었다. 경찰은 마약 판매 이외에 마약 업자들을 감싸고 도는 ‘덮개(비호자)’ 노릇도 하며 마약 업자와 공생 관계를 맺고 있다.

마약 가격은 구매 경로에 따라, 약물 종류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공정 가격’이 없지 않다. 예컨대 암환자들의 치료제인 ‘트라말’이라는 알약은 10개들이 한 판에 1천5백 루블(약 6만원)에 거래된다. 트라말은 약국에서도 공공연히 거래되는데, 이때 필요한 의사의 처방전은 5백 루블(약 2만원)을 주면 발급받을 수 있다. 매춘굴에서 인기가 높은 ‘엑스터시’는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비싸게 판매되고 있다.

마약의 폐해는 국민 건강은 물론 러시아 사회의 건강마저 위협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최근 모스크바에서는 이른바 ‘묻지마 살인 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생해 여성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최근 경찰은 유력한 살인 용의자를 체포했는데, 그는 정신 이상자와 다를 바 없이 심각한 마약 중독자였다.

러시아 정부는 대략 세 방향에서 마약 근절책을 마련하고 있다. 첫째, 외부로부터의 마약 유입 통로를 끊어버리고, 둘째, 내부 유통 고리를 차단하고, 마지막으로 마약 환자들을 격리·수용해 치료하는 일이다.
유통 경로를 차단하기 위한 노력은 중앙아시아와 카프카스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러시아에서 유통되는 마약의 70%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재배·생산된 것이다. 이 마약은 대부분 타지키스탄·키르기스스탄·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거쳐 러시아로 유입된다. 이외에 카프카스의 체첸 공화국을 통해 러시아 주요 도시로 흘러드는 마약도 상당량에 이른다고 당국은 파악한다.

러시아 영토 내에서 직접 생산된 마약도 있다. 이 마약은 주로 중·러 국경 지대인 극동 지역에서 생산된 뒤 기차나 자동차에 실려 모스크바로 운반된다.

러시아 마약 단속 작전은 전쟁을 방불케 한다. 마약 운반 조직은 대개 강력한 화력으로 중무장하고 있다. 지난 8월 중순 마약 전담 특전사 요원들이 모스크바 서남쪽에 있는 한 아파트에 둥지를 튼 마피아들을 급습했다가 매서운 기관총 반격을 받은 적이 있다. 마피아들은 보복 테러를 서슴지 않기 때문에 특전사 요원들은 작전에 나설 때면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다.

러시아 당국은 마약과의 전쟁에서 승리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사회 기강이 전반적으로 무너져 내린 상황, 즉 ‘병참선’이 허물어진 상태여서 싸움은 그리 쉬워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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