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도 관객도 지친 ‘심슨 재판’
  • 워싱턴·金在日 특파원 ()
  • 승인 1995.09.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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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 거듭하며 8개월간 질질…10월께 ‘재판 무효’로 마무리될 듯
미국민의 관심을 집중시키며 8개월간 지루하게 끌어온 이른바 ‘O.J. 심슨’재판이 결말을 보일 전망이다.

지난해 11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O.J. 심슨 재판의 배심원으로 선정된 12명과 예비 배심원 12명은 마치 입학 시험에 합격한 듯한 뿌듯함을 느꼈을 법하다. 그 두 달 뒤인 1월11일, 이 희대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격리 수용될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배심원들은 ‘내가 그 유명한 심슨 재판의 배심원’이라는 자부심에 들떠 있는 듯이 보였다. 그 후 2백50여 일간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을 해온 그들 대부분은 지금 탈진 상태다. 그동안 이러저러한 이유로 탈락한 배심원이 10명. 이제 남은 예비 배심원 2명도 여차 하면 자리를 뜰 판이다.

배심원들만 지친 것이 아니다. 판사·검찰·변호인단과 이 사건을 추적 보도하는 언론 매체 종사자들도 모두 지쳐 있다. 여론도 ‘이제 더 이상 끌지 말고 끝내라’는 쪽이다.

검찰측 증인 위증 밝혀져 재판 흐름 역전

전설적인 미식축구 선수 출신으로 인기를 한몸에 누렸던 심슨이 백인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것은 1년3개월 전이다. 일본계인 랜스 이토 판사는 1년 전 배심원 선정을 시작하면서 94년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재판이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재판은 크고 작은 반전이 거듭되면서 처음의 예상을 뒤엎고 엿가락 늘어나듯 연장됐다.

지난 7월 초 검찰측 심문이 마무리될 즈음만 해도 검찰측의 승리는 확실해 보였다. 검찰측은 장장 5개월여 동안 60여 증인과 5백개에 가까운 증거물을 내세우며 심슨의 유죄를 주장해 왔다. 특히 범행 현장에서 채취한 핏자국에 대한 DNA 분석 결과는 심슨을 꼼짝할 수 없는 살인범으로 옭아맸다. 살해 현장에서 수거한 다섯 방울의 혈흔을 분석한 결과 심슨의 것이 아닐 확률은 1억7천만분의 1이고, 살해된 니콜 심슨의 콘도 정문 근처에서 발견된 핏자국이 심슨의 것이 아닐 확률은 무려 5백70억분의 1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검찰의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변호인단은 ‘당대 최고의 변호사’로 꼽히는 조니 코크란 2세가 이끄는 막강 ‘드림 팀’이다. 변호인단은 지난 8월 말 재판의 흐름을 뒤바꿀 만한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냈다. 바로 검찰측이 비장의 증인으로 내세운 로스앤젤레스 경찰청의 전직 형사 마크 퍼먼이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인격의 소유자임을 밝혀낸 것이다. 퍼먼 형사는 심슨의 집에서 피묻은 장갑을 찾아낸 주인공인데 얼마 전 퇴직했다. 변호인단은 수색 영장도 없이 담을 넘어 들어간 퍼먼 형사가 흑인에 대한 증오감에 불타는 자로서, 심슨을 범인으로 만들기 위해 일부러 그 장갑을 범행 현장에서 가져가 그의 집 정원에 떨구어 놓고 자기가 그것을 발견한 것처럼 연극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퍼먼이 흑인 증오자임을 증명해야 한다. 변호인측은 재판 초기 그에 대한 반대 심문에서 ‘당신이 과거 10년 동안 Nigger(검둥이)란 말을 한번도 사용한 일이 없었다는 것이 사실이냐’고 질문해 그로부터 ‘그렇다’는 대답을 받아두었었다. 그런데 여자 경찰 세계에 대한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9년 동안 퍼먼을 인터뷰했던 로라 매키니란 여자가 녹음 테이프를 가지고 나타났다. 퍼먼의 증언은 이 테이프 속에서 통째로 뒤집히면서 재판의 흐름을 뒤바꿔 놓았다.

법정에서 생생하게 공개된 16시간 분량의 인터뷰 내용은 퍼먼이 ‘니거’란 경멸적인 표현을 마흔한 번이나 사용했음을 밝혀 주었다. 뿐만 아니라 신분이 불확실하다는 이유만으로 흑인을 체포할 뿐 아니라 좀 잘난 체하는 흑인을 체포할 때면 그의 운전면허증을 찢어 버리고, 흑인 범죄 혐의자의 얼굴을 짓이겨 놓는 일을 예사로 한 사실도 드러났다.

변호인단은 퍼먼이 인종 차별주의자이며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거짓말장이로서 증거를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는 인격 파탄자임을 부각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변호인단은 그동안 이 재판의 핵심 증인인 퍼먼의 진실성에 흠집을 내려는 목적으로 사설탐정을 고용해 퍼먼의 주변 인물 수백 명을 탐문해 왔다. 테이프 공개와 더불어 그때까지 전반적으로 검찰이 우위를 지켰던 재판의 흐름은 반전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 퍼먼 형사는 변호인측으로부터 증거를 조작했거나 거짓 보고서를 작성했느냐는 질문을 받고 돌연 묵비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철저하게 격리된 상태에서 심슨 사건에 관한 한 밖으로부터 어떤 정보도 접할 수 없는 배심원들이 퍼먼의 묵비권 행사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변호인단은 퍼먼이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배심원단이 알게끔 해 달라고 판사에게 요청했다. 그렇게 당당하게 증언하던 퍼먼이 갑자기 묵비권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배심원들이 안다면 뭔가 켕기는 것이 있기 때문임을 눈치챌 것이라는 속셈이었다.

이토 판사도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검찰측은 그럴 수 없다며 상급 법원에 항소했고, 그 결과 배심원에게 알려 편견을 갖게 해서는 안된다는 판결을 얻어냈다. 이 건에서는 검찰측이 승리한 것이다. 변호인측은 ‘그러면 문제의 장갑을 증거에서 제외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이토 판사는 이를 거절했다. 변호인단은 그밖에도 ‘퍼먼을 다시 증언대에 불러내자’ ‘지칠 대로 지친 배심원들을 풀어 놓고 재판을 진행하자’고 집요하게 요구했으나 상급심에서 모두 거부 당했다.

미국인 대다수는 “심슨 유죄 확실”

이토 판사는 초기에 교통 정리를 잘못해 재판을 필요 이상으로 질질 끌고 있다는 여론의 틈바구니에서 초조해진 나머지 신경질적인 반응을 자주 보이고 있다. 마음의 평정이라는 판사로서의 덕목과 관련해 자질 문제까지 거론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는 변호인측 심문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검찰측으로 하여금 반론하도록 지시했다. 배심원들이 처한 어려운 사정을 배려하고 재판을 빨리 진행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런데 지난 9월13일 영향을 미칠 만한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변호인단이 찾아낸 프레데릭 화이트허스트라는 연방수사국 과학실험실에 근무하는 현역 수사관이다. 그가 ‘과거에 범죄 수사와 관련한 과학 실험 과정에서 증거를 조작한 사례가 있었다’고 증언한 것이다. 변호인단은 그를 증인으로 채택하자고 요구했으나 검찰측은 이를 반대했다. 양측은 이 문제를 놓고 한참 실랑이를 벌일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변호인단은 다음날 ‘빠른 재판 진행을 위해’ 화이트허스트를 증언대로 불러내려는 계획을 포기했다. 그가 없이도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재판은 언제 어떻게 결판날 것인가. 재판 종결 시점에 관한 예측은 진행 상황에 따라 하루하루 다를 정도로 유동적이다. 관측통들은 대체로 10월 중순, 늦으면 10월 말께 마무리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현재 재판은 매우 신속하게 진행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양측이 곧 심문 절차를 끝내고 최후 진술에 들어갈 전망이다. 검찰측과 변호인측의 최후 진술이 끝나면 배심원단은 모든 증거물을 갖다 놓고 최종 심리에 들어간다. 빠르면 9월 중에 재판이 마무리될지도 모른다.

최종 심리에 들어가면 배심원 중 단 한 사람의 반대가 있어도 심슨은 유죄 판결을 받지 않는다. 배심원단이 만장일치로 합의하지 못할 경우 의견 불일치로 인한 재판 무효가 선언된다. 그렇게 되면 심슨은 일단 석방된다. 그리고 검찰은 이 건을 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대다수 미국인들은 퍼먼에 관한 테이프 공개에도 불구하고 심슨이 여전히 범인이라고 믿고 있다. 최근 ·CNN·갤럽 세 기관이 공동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67%가 심슨이 범인일 것이라고 답변했다. 또 남은 재판 기간에 돌출 변수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배심원 12명 중 흑인이 9명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심슨 유죄’로 판결이 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무죄로 풀려 나올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재판 무효 정도만 끌어내도 검찰측의 얼굴이 선다는 것이 현재 법원의 주변의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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