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통신] 이탈리아 좌파정권 ‘가시밭길’
  • 파리·고종석 편집위원 ()
  • 승인 1996.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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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좌파 연합(올리브동맹)이 이탈리아 총선에서 승리했음을 전하는 4월22일 아침 프랑스 방송·신문 들의 화두는 미리 짜기라도 한 듯 ‘페포네의 역사적 승리, 돈 카밀로의 역사적 패배’였다.

80년대 초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어 베스트 셀러가 된 조반니노 과레스키의 유명한 연작 소설 <돈 카밀로와 페포네>에서 공산주의자 읍장 주제페 페포네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집권이 아슬아슬하게 좌절될 때마다 그의 라이벌인 ‘반동적’ 신부 돈 카밀로에게 조롱당한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돈 카밀로가 지지했던 기독교민주당은 현실에서 부패하고 무능해 94년 총선 때 와해되었다. 그런 지 2년 만에, 읍장 페포네는 드디어 자기 소속당이 집권하는 것을 목격했다. 비록 그 당이 공산당이라는 이름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명제를 폐기 처분하고 좌익민주당이라는 이름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변신한 이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예상을 벗어난 총선 결과가 알려진 4월22일 새벽, 열광하는 좌파 유권자들이 몰려든 로마의 스페인 광장에는 올리브동맹의 녹색 깃발과 함께 붉은 깃발도 물결쳤다. 그런데도 그 이튿날 로마 증시와 리라화는 예외적인 강세를 보였다. 투자자들의 ‘레드 콤플렉스’가 깨진 것이다.

그러니 이번 총선 결과를 역사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수사 이상이다. 이웃 나라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잇달아 좌파 정부가 무너지고, 파시스트 정당 ‘민족 동맹’의 당수 지안프랑코 피니의 개인 인기가 정치인 가운데 최고이리만큼 국내 여론도 보수화해 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던 터여서 더욱 그렇다.

사회민주주의적·유럽주의적 정책 펼 듯

이탈리아 새 내각을 총리 자격으로 이끌 사람은 정당 배경 없이 지난해 올리브동맹을 조직하여 이번 선거를 이끈 전직 경제학 교수 로마노 프로디(57)다. 그러나 올리브동맹의 중추가 공산당의 후신인 좌익민주당인 만큼, 새 내각에 각료를 다수 배치할 좌익민주당의 서기장 마시모 달레마의 영향력이 총리에 못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좌익민주당은 이번 총선에서 유효 투표의 21%를 얻어 군소 정당이 난무하는 이탈리아 정치권에서 최대 정당이 되었다. 반면에 지난 2년 동안 이탈리아 정치를 쥐락펴락하던 재벌 정치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제2의 무솔리니를 꿈꾸던 지안프랑코 피니는 그들의 우파연합(자유연합)이 패배함으로써 당분간 숨을 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카톨릭 신자이고 유럽주의자이면서 사회민주주의자라는 점에서 흔히 유럽연합의 이전 집행위원장 자크 들뢰르에 비유되는 로마노 프로디는, 마시모 달레마의 좌익민주당 등 여러 빛깔의 좌파·중도파 정당으로 이루어진 올리브연맹을 기초로 전후 이탈리아 정치사에서 가장 사회민주주의적이고 유럽주의적인 정책을 펴나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앞에 놓인 난관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도 올리브동맹에 가입하지는 않고 이번 선거에 협조한 재건파 공산당(좌익민주당에 참여하지 않은 옛 이탈리아 공산당의 소수파)이 벌써부터 임금과 물가에 연동제를 실시하고 대규모 고용 확대 계획을 세우라고 요구하고 있다. 올리브동맹이 상·하원 모두에서 의석의 반수에 아슬아슬하게 미달함으로써 정국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서는 재건파 공산당의 협조가 필수인데, 그들이 요구하는 급격한 사회보장 확대는 지금도 적자가 누적되어 있는 공공 재정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또 이번 선거에서 좌우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은 채 롬바르디아·베네치아 등 북부 지방을 휩쓴 ‘북부 동맹’의 분리주의 요구를 어느 선에서 수용할 것이냐 하는 문제도 새 내각에는 큰 짐이다. 지안프랑코 피니로 상징되는 민족주의도 정부의 유럽주의 강화에 대한 반동으로 지금보다 더 힘을 키울 수 있다. 이탈리아의 ‘왼쪽으로 난 길’은 가시밭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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