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은 실컷 봤지? 이제 등을 보여주마
  • 토론토·김영신(자유 기고가) ()
  • 승인 2001.08.2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1세기 패션 화두는 '섹시한 뒷모습' 강조하기


'이제는 가슴의 시대가 아니라 등의 시대다.' 캐나다의 전국 일간지인 〈글로브 앤드 메일〉의 최근 패션 특집 기사는 매우 도발적이다. '가슴'에 매혹되던 시대의 종언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 패션의 새로운 화두는 '등으로의 복귀'(The Back is back)가 될 것'이라고 〈글로브 앤드 메일〉은 주장한다. 그 논리와 정황을 소개한다.




그것은 오로지 '가슴'을 찬양하는 시대였다. 1990년대 패션의 주제어는 가슴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젖가슴을 부풀리기 위해 실리콘 주머니를 넣는 유방 성형 수술이 성행하고, 가슴 사이의 깊은 계곡을 드러내는 의상이 인기를 끌었다. 최고급 여성 속옷 브랜드인 '빅토리아스 시크릿'의 모델들은 그처럼 아슬아슬한 육체의 '계곡'을 강조한 속옷 차림으로 유행을 선도했고, 그것을 입은 사람들은 유명 인사로 대접받았다.


그러나 이제 그런 모든 것들이 조금은 지나치거나, 쓸모 없는 일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심지어 '쭉쭉 빵빵'한 몸매의 상징이라 할 파멜라 앤더슨의 그 풍만한 가슴조차 빛이 바랜 느낌이다. 그 대신 사람들은 여배우 니콜 키드먼이 지금은 전 남편이 되어 버린 톰 크루즈의 영화 〈미션 임파서블2〉의 시사회 때, 그리고 2000년 아카데미상 시상식 때 선보였던 '등 벗은' 의상에 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파격적인 패션 감각을 자랑하는 가수 겸 배우 제니퍼 로페스도 최근 그녀의 '100만 달러짜리' 엉덩이(실제 그녀는 자신의 엉덩이와 다리에 엄청난 액수의 보험을 들었다)의 곡선을 드러내며 가슴에서 등으로 '초점 이동' 주장에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큰 화제를 모은 패션도 가슴이 깊이 팬 파멜라 앤더슨 스타일의 드레스가 아니라, 드류 배리모어나 캐서린 제타존스가 입은 허리께까지 등이 드러나는 가운이었다. 올 여름에는 홀터(halter:목에 거는 앞치마처럼 만들어 팔과 등이 드러나게 한 여성 의류)가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이었다. 하긴, 그런 옷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등을 내보일 수가 있겠는가!


옷에 맞추어 변형하는 브래지어 출시


이런 현상은 수은주가 떨어져도 수그러들지 않을 모양이다. 2001∼2002 추동 기성복 컬렉션에서, 세계 유명 디자이너들은 앞다투어 이런 경향을 강하게 보여주었다. 등판이 없는 드레스·스웨터·블라우스가 무대 위에 넘쳐났다. 패션계의 혁신아로 불리는 장 폴 고티에는 심지어 트렌치 코트조차 그런 식으로 다시 만들어냈다. 겨울이 지독하게 추운 나라에서라면 결코 반갑지 않을 전위적인 스타일이다.


이탈리아 밀라노 컬렉션에서 막스 마라는 등판이 열린 스웨터들을 선보였다. 울과 데님, 코듀로이와 가죽 소재의 바다에 인간의 피부가 마치 섬처럼 떠 있는 형국이었다. 펜디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 역시 어깨와 등뼈 위로 '열 십'자 모양의 끈을 가로지르는, 사도-마조히즘 스타일의 탑스(tops)로 등에 하이라이트를 형성했다. 니나 리치의 파리 컬렉션에서도 등쪽으로 깊이 패여 허리 바로 위에서 고리를 잠그는 검정 스웨터가 눈길을 끌었다.


캐나다 퀘벡 판 〈엘르〉의 패션 디렉터인 드니 데즈로는, 이러한 디자인이 올해 추동 시즌 정장에도 쉽게 반영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직장에서 낮 시간에는 정장 속에 받쳐 입었다가, 저녁 때 상의만 벗으면 그대로 파티복이 된다는 식이다."




등을 드러내는 패션이 대유행 조짐을 보이자 관련 업계도 덩달아 바빠지고 있다. 몬트리올의 속옷 제조업체인 제이 그르니에 사는 어깨만 드러냈는지, 혹은 홀터이거나 열 십 자 모양 끈이 있는지, 등이 깊이 팬 의상인지에 따라 여섯 가지 다른 스타일로 변형할 수 있는 새 브래지어를 출시했다. 트라이엄프 인터내셔널도 이와 유사한 컨버터블 브래지어 3종을 선보인 바 있다.


화장품 업계는 '이제 등 화장에 투자할 때'라고 조언한다. 토론토의 '이시 파리 사이언티픽 스킨 케어 클리닉'의 매니저인 고다나 터낸식은 "피부 노출이 많아진 만큼 피부 재생과 수분 공급, 진정 효과에 대한 요구가 늘고 있다"라고 귀띔한다. 특히 등은 신체의 다른 부위보다 기름기가 많고, 잔털이 있거나 여드름이 돋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특별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피부 레이저 박리술과 허브 마사지를 권장하기도 한다.


"등 드러낸 패션은 용기 있는 여성을 위한 것"


등을 드러낸다고 해도 뼈만 앙상한 트위기 스타일을 보여주자는 것이 아닌 만큼, 적당히 근육 잡힌 팽팽하고 매끄러운 상체를 만드는 것도 큰 관심거리다. 팔·어깨·척추 부위의 근육을 다듬기 위해 체육관을 찾는 여성들도 적지 않다. 그렇다고 해도 등의 맨살을 내보이는 데는 얼마간 배짱도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등을 벗는 트렌드는 용기 있는 여성을 위한 것이다. 멋진 몸매가 있어야 하고, 그에 대한 자부심도 있어야 한다." 엘리 타하리, 자오 등 유명 패션 브랜드의 캐나다 배급책인 에스이씨이 어패럴 부사장 킴 구옌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다시 문제는 '성'(sex)으로 돌아간다. 하기야 패션이 언제 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가. 따라서 등이 성감을 유발하는 부위로 새로이 등장했다기보다, 재등장한 것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1920년대에 유명한 볼룸 댄서였던 아이린 캐슬은 길고 우아한 등의 곡선과 경사를 훤히 드러내는 치렁치렁하고 구슬을 박아 넣은 드레스를 입고 무대 위를 휘젓고 다녀 '등 벗은 패션'이 유행하는 데 불을 붙였다. 1930년대에는 인기 상승 가도에 있던 할리우드 여배우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상징하는 '그을린 피부'를 과시하기 위해 앞다투어 등이 훤히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어댔다. 홀터 탑스와 백리스(backless) 팬츠 수트는 노출과 섹스에 과도하게 열광했다고 특징 지어지는 '디스코의 1970년대'에도 계속 살아 남았다.


요즘의 등 벗은 패션이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헵번이 입었던 검은색 모래시계 형태의 시스(sheath:몸에 딱 붙는 여자 드레스)와 똑같다고 할 수는 없다. 오늘날의 그것은 1950년대 스타일의 상징인 우아함 대신에 섹시함이 매우 강조되며, 내적인 통제에서 해방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벗은 등을 강조하는 패션은 여성스러움과 섹시함이라는 전체 조류의 일부이다"라고 구옌은 말한다. "가슴의 계곡은 너무 많이 봤잖아요. 결국 지나치면 질리게 되니까요. 거기에 비해서 등을 깊게 파는 것은 새롭죠. 더 신선하고요."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