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 질주 노리는 미국의 '무한 정의' 작전
  • 모스크바·정다원 통신원 (dwj@e-sisa.co.kr)
  • 승인 2001.09.2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국, 중앙아시아 거점 확보→
국제 질서 새 판짜기…러시아, 적극 견제 나서
크렘린이 워싱턴의 동향에 주목하며 재빠르게 정치·외교·군사 행보에 돌입했다. 미국이 테러 응징을 명분으로 국제 정치의 틀을 새로 짜려 한다고 간파한 것이다.


워싱턴은 오사마 빈 라덴과 ‘판도라의 상자'라고 불리는 아프가니스탄에 테러 보복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미국이 빈 라덴의 범죄를 입증할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워싱턴은 국민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한 임시 카드로 ‘빈 라덴과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을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러시아 주간지 〈MN〉은 주장했다. 최근 빈 라덴은 〈MN〉(9월18일자)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슬람 탈리프 법정에 설 용의가 있다. 그러나 중립국 법정은 믿지 못한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테러 혐의를 강하게 부인했다.




러시아는 미국이 빈 라덴의 범죄를 입증할 분명한 증거를 아직 찾지 못했고, 그로 인해 국제 여론이 악화할 가능성이 있는데도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서두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공략함으로써 세계 질서를 개편하려고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크렘린이 미국의 외교·군사 동향에 바짝 긴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번 테러 사건이 발생하기 전 워싱턴은 나토 확장 정책의 일환으로 중앙아시아 공략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즉 발칸 반도에 거점을 확보한 후 미국은 이스라엘-터키-아제르바이잔-그루지야 동맹축 건설을 계획했고, 이후 중앙아시아 국가를 집중 공략한다는 점진 전략을 짠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적 교두보는 클린턴 때 이미 구축했다. 러시아 국내 문제가 복잡한 틈을 타서 카스피 해 지역의 송유관 건설권을 따내려고 집요하게 로비해온 미국은 지난해 러시아와 이란을 제외한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석유·가스 송유관 부설 협정에 조인했다. 카스피 해 연안국인 카자흐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국가에 대한 클린턴 정부의 영향력 확대는 크렘린의 위기 의식을 키웠다. 지난해 8월 러시아 휴양 도시 소치에서 열린 독립국연합(CIS) 정상회담에서는 카스피 해 문제가 핵심 의제였다.


미국은 전쟁 준비와 함께 외교 전술도 병행하고 있다. ‘테러 응징'이라는 명분과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미국은 동참이나 협조를 거부하는 국가에는 상응하는 제재는 물론 공격도 불사하겠다고 밝혔다. 폭탄 테러에 환호성을 터뜨렸던 이라크·팔레스타인·수단·나이지리아는 ‘무한 정의 작전'으로 명명된 이번 전쟁의 주요 타깃이 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불복종 국가 정권을 무너뜨리고 친미 정권을 수립하려고 기도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 중 이란의 모하마드 하타미 정권은 ‘타도 대상 1호'로 손꼽힌다.


이란은 미국의 눈엣가시. 불과 한 달 전 카스피 해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카스피 해 유전 이권을 둘러싸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이 한판 붙으려는 위기 상황이 발생하자 미국은 나토 회원국 터키를 내세워 전쟁을 부추기며 이란과 일전을 별렀다. 다급해진 러시아가 비밀리에 이란과 군사협력 협정을 맺음으로써 카스피 해 위기는 고비를 넘겼다.


파키스탄 확보는 ‘꿩 먹고 알 먹기' 전략




미국은 테러 응징을 위한 전략적 교두보로 파키스탄을 선정하고 특공대를 주둔시킬 태세이다. 지리적으로 파키스탄은 응징 대상국인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지상군을 투입하기가 쉽다. 중앙아시아를 공략하고 러시아와 중국을 압박하는 데 적합한 위치에 있으며, 달러라는 ‘당근 효과'가 먹힐 수 있는 국가라는 판단도 한몫 했다. 파키스탄과 국경을 맞댄 중국·이란은 즉각 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이란은 미군이 파키스탄에 들어가면 입술이 사라진 이처럼 추위를 탈 것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9월18일 긴급 독립국가연합 정상회담을 열어 대책 마련에 나섰다. 이는 미국의 유혹에 빠진 우즈베키스탄이 동요하는 것을 막고 미국의 중앙아시아 공략과 함께 일어날지도 모를 돌발 사태에 대처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정상회의 의제는 비밀이었다. 인터넷 통신 SMI.ru는 9월18일 ‘집단 방위 체제'가 논의되었음을 시사했다. 사실상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러시아의 군사력을 빌리지 않고는 자체 방어가 힘든 상황이다. 러시아 국가안전위원회 보좌관 블라지미르 루샤일로는 타지키스탄 수도 듀샨베를 방문했다. 연방안전국(FSB)도 정보 수집과 군사 작전에 적극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크렘린이 북 카프카스와 카스피 해에 군사력을 증강하는 이유도 중앙아시아에 대한 위기 의식에서 나왔다. 특히 카스피 해 군사력은 괄목할 정도로 증강되었다.


러시아가 예상한 대로 미국은 테러 전쟁 협조 명목으로 아프가니스탄 국경에 인접한 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을 외교적으로 공략했다.


우선 미국은 1999년 수도 타슈켄트 폭발 테러 사건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적대 관계인 우즈베키스탄에 접근했다. 우즈베키스탄의 외무장관 압둘라지즈 카르밀로프는 미국 공군에 한 비행장을 기지로 사용하라고 허가했다고 〈워싱턴 포스트〉와 가진 인터뷰에서 간접 시인했다.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까지 1시간 반 비행 거리에 있는 이 비행장이 ‘침략자의 무덤'이 될 아프가니스탄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미국은 판단한 것이다. 또한 타슈켄트는 빈 라덴이 숨어 있는 힌두쿠 시의 지형·지리에 정통한 군인들을 동원해 빈 라덴에 대한 공격에 협력하겠다는 파격적인 카드를 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정보와 통역원이 부족해 아프가니스탄 공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미국에는 긴요하고도 반가운 제안이 아닐 수 없다.


타지키스탄, 미국의 ‘포섭 대상 1호'


타지키스탄 정부는 공식 부인했지만 타지키스탄이 미국 전투기의 영공 통과를 허용하고 비행 기지를 제공했다는 소문이 있다. 타지키스탄에는 1989년 아프가니스탄 전투에서 철수한 러시아 병력 만명이 국경을 경비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는 이 지역 방어력을 증강하기 위해 러시아 국적 타지크인 7천명으로 구성된 201기동사단을 배치했다. 201기동사단은 탱크·대공포·전투기·저공 정찰기·헬리콥터로 무장하고 있다. 타지키스탄 육군과 국경을 수비하는 러시아군이 연합작전 훈련에 돌입할 것이라는 소문도 돌고 있다.


러시아가 타지키스탄을 중시하는 까닭은 중국과 국경을 접한 이 나라가 미국의 ‘공략 대상 1호'가 될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이다. 타지키스탄이 이번 전쟁을 계기로 미국과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것은 러시아와 중국에게는 악몽이 아닐 수 없다.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도 국제 테러주의에 대한 미국의 투쟁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군사 작전에는 개입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최근 중국과 경제 협력 관계를 강화한 투르크메니스탄은 전쟁이 일어나 아프가니스탄을 통과하는 자국 가스·원유 수송관이 파괴될 것을 염려하고 있다.


미국이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공략하는 진의는 무엇일까? 두말할 것 없이 북극곰(러시아)과 판다곰(중국)을 압박하려는 것이다. 만일 미국이 아랍권과 남아시아 패권을 장악한 데 이어 중앙아시아에까지 군사 거점을 확보한다면, ‘판짜기 게임'은 끝나고 21세기 국제 정치 무대에서 미국이 무한 질주를 하게 될 것이다.


‘무한 정의'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걸고 중앙아시아 쪽으로 군사력을 이동하고 있는 부시를 크렘린과 베이징이 매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지켜 보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