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장정일씨 특별 기고 <내게...>파눈에 대한 입장
  • 파리·장정일 (소설가) ()
  • 승인 1996.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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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이 읽어야 할 책이 따로 있다. 그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술과 담배도 청소년이 이용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금지되어야 한다. 나는 위선적인 성인들에게 악영향을 줄 분명한 목적으로 <내게 거짓말을
장편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김영사 펴냄)가 음란물 판정을 받으면서 촉발된 장정일 파문은 11월13일, 김영사 김영범 대표 권한대행이 구속된 이후 새로운 차원을 맞고 있다. 문단 내부에서는 이 소설이 문학이냐, 아니냐를 놓고 논쟁이 시작되었고, 이와는 별도로 국내외 문인 천명을 목표로 장정일 사법처리 반대 서명 작업이 확산되고 있다. 때마침, 파리에 머무르고 있는 작가 장정일씨가 <시사저널>(제370호)에서 밝힌 대로 자신의 입장을 보내왔다. 장씨의 기고가 문단 안팎의 논의에 생산적으로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편집자>

나는 내 소설을 옹호하지 않으려고 한다. 오히려 나는 내 소설의 유죄를 스스로 시인하고자 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숱한 이론과 설명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문학이 의사 소통이라는 데에 합의하고 있다. 문학이 의사 소통이라면 진정한 의사 소통은 악과의 대화를 포기해서 안된다. 진정한 작가는 문학에게만 유일하게 허여된 그 능력과 특권을 자랑스럽고 고통스레 받아들인다. 악과 의사 소통하는 문학. 그것은 이미 유죄이다.

사드나 보들레르가 그랬듯이 문학의 유죄성을 벗겨줄 것은 시간밖에 없다. 고통스럽지만 작가는 그 사실 또한 자랑스레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문학만이 시간을 살아 남기 때문에. 그렇다면 시간만이 유죄인 문학을 무죄로 건져올릴 수 있다는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당대의 사회적 통념이 규정해 놓은 선악 개념이 또 다른 당대에서는 바뀐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문학은 다시 유죄이다. 그것은 미래의 선악을 미리 선취하려는 죄를 지었다.

이렇듯 무섭고 불온한 존재인 한 어떻게 사회가 문학을 용서하겠는가? 이상 국가를 꿈꾸었던 플라톤이 시인 추방을 주장한 까닭은 바로 그래서다. 건전한 사회는 절대 문학이 발붙일 틈을 주어서는 안된다. 하여 나는 내 소설을 문제 삼고 금지시킨 시민단체와 간행물윤리위원회의 논리 가운데 하나를 용납한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사회적 통념의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에 판금되어야 하고 사법부에 의해 단죄 받아 마땅하다. 대신 상처 받은 조개가 진주를 내뱉듯이 유죄인 나는 당신들께 준다. 우리 사회는 악과 대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즉 오래된 가치의 경계를 새로 조정할 능력을 갖추었는가?

사회적 통념과 어긋남을 질책하는 법 앞에 문학은 가련하다. 문학의 본래가 그러하기 때문에 그것은 원죄나 같다. 문학은 무방비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 기회에 시민단체와 간행물윤리위원회가 마구 휘둘러대는 엉터리 논리 하나는 꼭 반박하고 싶다. 청소년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느냐의 여부로 음란물을 판정하고, 청소년을 악영향에 빠뜨릴 위험성 때문에 음란물이 단속되어야 한다는 그 유치하고 우스운 논리 말이다.

청소년은 청소년이 읽어야 할 책이 따로 있다. 문화체육부가 추천하는 청소년 권장 도서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술과 담배도 청소년이 이용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금지되어야 한다. 잘난 분들은 왜 그것도 구분하지 못하나? 똑똑히 들어라. 나는 위선적인 성인들에게 악영향을 줄 분명한 목적으로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썼다. 그러나 성인에게 맞지 않는 아동복을 억지로 입히지 말라.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외압에 의해 하이틴 작가가 되기를 강요 받고 있다.

상식 있는 시민단체라면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청소년이 읽을거리가 아니다라고 말해야 옳지, 청소년이 읽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성인이 쓰고 읽을 권리를 빼앗아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아도 방송 프로그램과 극장과 연주장 등에서 성인이 쫓겨나고 있는 현실이고, 20대가 넘으면 록카페마저 입장 불가다. 그런데 이제 문학판마저 록카페화하자는 것인가? 성숙한 문화는 당연히 성인이 주축이 되어야 하고 그들의 세계와 주장이 표현되어야 한다. 소수의 청소년을 보호하느라 대다수 독자의 권리를 빼앗는 것은 한 나라의 문화적 역량을 어린이의 키에 맞추어 재단하는 문화적 자폭이다. 그런데도 이런 유치한 논리가 설득력을 가졌던 것은 한국이 청소년 과보호 사회이고, 부모들이 ‘너는 그 책을, 혹은 영화를 아직 보아서는 안돼!’라고 말할 권위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책이나 영화나 연극이 문제될 때마다 방송에 출연한 근엄한 어른들이 한다는 소리라곤, 시종일관 청소년이다. 왜 그들은 자기 의견을 말하지 못하고 줏대 없이 애들을 찍어 바를까. 우리는 듣고 싶다. 장관이나 장로들이 이런 책을 읽고, ‘나는 이렇게 느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을. 그러면서 자신의 축적된 인생관·세계관·예술관을 드러내는 것을.

어르신들의 ‘청소년 악영향 타령’ 문화에 무익

이른바 사회 지도 인사들은 몇년 동안 한 편의 소설도 읽지 않다가 이런 문제작이 나와야 얼씨구나 하고 달겨든다. 그런 수준이니 소설 자체를 두고 몇 시간씩 이야기꽃을 피울 재주가 없다. 오래 전부터 달달 외우고 있던 윤리 규범으로 소설을 집적댈 줄은 알아도 예술을 판단하기엔 역부족이다. 그래서 어르신들의 토론은 우리 문화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청소년 악영향 타령이나 하다가 끝난다. 꼭 초등학교나 중학교 학생들의 학급회의 같다. 논술 공부를 하는 고등학생들만 해도 안 그럴 텐데. 하긴 청소년 악영향 타령이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만에 하나 청소년이 음란물을 읽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범죄로 곧바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연구는 이미 나와 있다. 음란물을 읽은 청소년이 성범죄를 일으킬 가능성은 당사자의 이성 친구 유무, 가정 문제 유무, 부모 결손 유무, 대화 상대자 유무, 상급 학교로의 진학 유무, 취직 여부 등에 따른다. 이 연구는 공인된 청소년 선도 기관에 오랫동안 몸담았던 상담가의 경험을 토대로 했다. 청소년 과보호에 관심 없는 나도 아는데 청소년에게 그토록 관심이 많다는 사회 지도 인사들은 왜 모를까? 비겁하게도 그들은 이 사실을 알고도 외면한다. 까닭은 성범죄를 포함한 여러 청소년 문제가 사회의 제도적 결함이기보다, 한 소설가의 책임인 것이 그들을 편케 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청소년을 타락케 한다는 이유로 기소되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런 일례를 볼 때 이 죄과는 무척 오래된 역사를 가졌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기소되고 사형을 받아야 했던 진짜 이유는 그가 귀족들과 지배층의 비위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모든 지배층이나 보수주의 세력은 자신의 정치적 욕심이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청소년을 타락시킨다는 꼬투리로 희생양을 잡아 왔다. 박정희 대통령이 청소년 풍기 문란을 빌미로 장발과 기타를 단속할 때 우리는 그의 독재 야욕을 보지 못했고, 마광수 교수는 대통령 선거 두 달 전에 전격 구속되었다. 나는 뒤늦은 김영삼 대통령의 부정부패 척결 의지를 환영하지만, 구색갖추기로 이용되기는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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