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불교 국제화 앞장선 무상사 무심 스님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4.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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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절집은 생각보다 깊은 산중에 있었다. 충남 계룡시 두마면 계룡산 초입에 접어든 뒤 마지막 민가를 지나 한참을 거슬러올라가서야 수풀 너머로 현대식 한옥 세 채가 지붕 선을 드러냈다. 지난 5월12일 오후.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절 뒤로 우뚝 솟은 국사봉 꼭대기는 비구름에 묻혀 있었다.

절 초입에 들어서자 납의를 걸친 눈 푸른 스님 몇이 바삐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무상사 국제선원이 세워진 지 4년째. 어느덧 이곳은 본사인 서울 화계사 국제선원과 함께 한국 선을 세계에 전파하는 양대 수행 도량으로 자리 잡았다. 그동안은 선방과 요사채만 있었는데, 최근 대웅전이 완공되면서 온전한 사찰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주지 무심 스님(47)은 며칠 앞으로 다가온 대웅전 점안 봉불식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를 기다리며 절 구경을 하다가 한국 사람과 비슷한 이가 있어 말을 붙여 보았다. 말레이시아 태생인 명안 스님(46)이다. 열다섯 살에 영국 유학을 떠나 대학원 MBA 과정까지 마친 그는 홍콩에서 금융회사에 다니다가 7년 전 머리를 깎았다. “경력과 돈을 쌓을수록 마음속 고통이 커갔다”라고 그는 말했다.
무상사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은 명안 스님처럼 고등 교육을 마치고 직장을 다니다가 한국 선불교를 접한 뒤 출가한 이가 대부분이다. 현재는 해제 기간이어서 각자 자기 나라로 떠나고, 미국 러시아 폴란드 체코 헝가리 리투아니아 등지에서 온 스님 12명만이 수행하고 있다.

“많이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 그래요, 그래요.” 한참을 기다린 뒤에 무심 스님이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방에 들어섰다. 푸른 눈에 우뚝 솟은 코만 아니라면, 폼이 완벽한 한국 사람 같다. 나이를 물으니 ‘한국 나이로 마흔일곱’이란다.

그는 유태인 교육자 집안 출신이다. 본명은 조슈아 헨리 레아. 중학교 때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1971년 변호사이던 삼촌 손을 잡고 워싱턴까지 가서 베트남 전쟁 반대 데모에 참가했다. 하지만 너무 일찍 깨여서일까. 보스턴 대학 화학과에 입학한 뒤부터는 사회적 이슈보다 내면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1960~1970년대 미국에는 케네디 암살, 베트남 전쟁, 닉슨 탄핵 같은 충격적인 일이 많았어요. 이런 것이 아마 서양인들로 하여금 동양 사상이나 내면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지 않았을까요?” 대학을 졸업하고 자연 식품 회사에 다니던 그는 1979년 명상센터에서 숭산 스님을 만난 뒤 한국 선에 빠져들었다.

그를 비롯해 국내에서 활동하는 푸른 눈의 납자들을 설명하기 전에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이가 숭산 스님이다. 경허·만공·고봉으로 이어지는 한국 불교의 선맥을 이어받은 그는 30년 이상 해외에 머무르며 35개국에 선원을 1백50여 개나 세웠고, 70명이 넘는 푸른 눈의 납자들을 길러냈다.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쓴 현각 스님은 숭산 스님의 제자이자 무심 스님의 사제다. 숭산 스님은 현재는 서울 화계사 조실로 있는데, 몸이 편치 않아 활동이 예전만 못하다.

“큰스님(숭산)을 통해 참된 나를 알았어요. 참선은 철학도 기술도 아닌 실천입니다. 1979년 큰스님을 처음 뵈었을 때 어떻게 수행해야 하나요, 라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스님께서 ‘내려놓게! 모든 것을 놔버리게!’라고 하시더군요. 이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고 출가까지 하게 되었죠.”

이후 5년 동안 머리 기른 수행자로서 옷도 빨고 운전도 하면서 큰스님을 시봉하던 그는 1984년 숭산 스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정식 승려가 되었다. 그 즉시 한국에 온 그는 이후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지도법사와 선원장을 거쳤고, 재작년부터 무상사 주지를 맡고 있다. 올해로 법랍 20세를 맞은 그는 숭산 스님의 외국인 제자 가운데 최고참이다.

그는 다른 외국인 스님들과 달리 범어사에서 정식 비구계를 받은 조계종 승려이다. 한국 스님들과 어울려 안거 수행을 한 경험이 서너 차례나 된다. 그는 이때마다 문화적 차이 때문에 마음고생을 했다고 한다. “한국 스님들은 저녁 때 양말을 빨아 따뜻한 온돌방에 깔아서 말리는데 그게 한참 동안 적응이 안됐어요. 목욕날을 정해 단체로 목욕하는 것도 낯설었죠. 무엇보다도 스님들의 ‘끼리끼리 문화’에 적응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무심 스님은 이런 자신의 경험을 되살려 무상사를 내외국인들이 편하고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수행 공간으로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동안거와 하안거 때 참가자들은 1주일 단위로 결제에 참가할 수 있으며, 스님과 일반인들이 함께 어울려 선 수행을 한다.

무상사에 도착한 뒤 내내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사월 초파일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절 안 어디에도 연등이 달려 있지 않았다. 물어보니 역시 사연이 있었다. “외국에서 온 수행자들은 대부분 참선만 하고 싶어해요. 그래서 무상사에는 아직 신도가 없어요. 그러나 포교를 안할 수는 없죠. 절도 경쟁한다는 걸 예전에는 잘 몰랐어요. 수행만 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건물 짓고, 밥 먹고, 아프면 병원에 가고, 겨울에 기름도 사야 하고, 그러려면 시주가 들어와야 하는데 말이죠. 주지를 맡은 뒤에야 이 모든 걸 깨닫고 있어요. 허허.”

사판승 ‘수완’도 지닌 이판승

그래도 그는 주지를 맡은 지 2년 만에 대웅전 불사를 완성해내 ‘사판승’ 수완을 톡톡히 보였다. 불사에 든 돈은 대부분 외국의 선센터 수행자들이 기부한 것이다. 그는 ‘설교도 하고 법문도 하고 참선 지도도 하며 벌어들인 돈’을 불사에 보탰다. 그러면서 그는 웬만한 한국 사람보다 훨씬 세상 물정을 많이 알아버렸다. 그는 현재 종무소로 쓰는 가건물을 시가 철거하라고 한다며 걱정했다. 그의 꿈은 ‘아직 나이가 마흔 몇밖에 안되니까 몇 년 더 행정 일을 본 뒤 후계자한테 넘겨주고 참선하며 사는 것’이다.

그에게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한 말씀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이런 ‘법문’을 내놓았다. “이라크 전쟁을 보듯 세상사의 갈등은 남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 종교가 있지만 종교의 역할은 다 같습니다.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했죠. 불교에서도 ‘마음이 곧 부처다’라고 합니다. 내 마음을 잘 다스리면 그게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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