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백야 3.98> 극본 빈약, 연출은 요란
  • 蘇成玟 기자 ()
  • 승인 1998.10.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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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드라마 <백야 3.98>에 ‘혹평’ 쏟아져…신인 작가·거장 연출가의 호흡 불일치
지난 8월31일 SBS 특별 기획 드라마 〈백야 3.98〉이 첫 전파를 타던 날, 매스컴은 온통 북한이 발사한 로켓 추진 물체가 일본 근해에 떨어졌다는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국제 관계에 ‘적신호’를 울린 사건이었지만, 〈백야 3.98〉 시청률에는 ‘청신호’가 될 수 있는 뉴스였다. 공교롭게도 이 드라마가 북한의 도발을 주요 소재로 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월·화 드라마인 〈백야 3.98〉은 첫회에 시청률 32.2%를 기록하며 단숨에 종합 시청률 3위에 올라섰다. 〈여명의 눈동자〉 〈모래 시계〉로 90년대 최고 화제작을 생산해 온 ‘김종학 사단’이 다시 맹위를 떨치는가 싶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방영 둘째 주부터 조금씩 기울기 시작한 시청률은, 셋째 주에 이르러 28%대로 밀리며 종합 시청률 순위에서 9위에 그쳤다. 김종학 PD가 연출한 작품들이 초반보다 후반으로 갈수록 기세를 올렸던 선례로 볼 때 뜻밖의 일이었다.

이야기 구조, 우연과 과장 넘쳐

시청률만 하향세를 보인 것이 아니다. PC통신이나 일간지 등에서도 혹평이 쏟아졌다. 김PD가 이전 작품들에서 이미 선보였던 명장면들을 ‘자기 복제’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할리우드 영화를 모방한 듯한 액션,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한 남·북한 인물 묘사와 상황 설정, 우연과 과장으로 점철된 이야기 구조 등 비판의 내용도 다양했다.

전체 20부작으로 제작되어 이미 방영된 분량보다 남은 분량이 더 많은 시점에서 시청률의 향방을 속단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백야 3.98〉이 과거 김종학 PD의 작품들이 성취했던 완성도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는 별 이론이 없어 그 원인만은 짚고 넘어갈 만하다.

우선 가장 중요한 창작 주체인 작가와 연출가의 팀워크가 과거만큼 매끄럽지 못하다는 점을 주요 요인으로 들 수 있다. 극본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성패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평가될 만큼 중요하다. 〈여명의 눈동자〉와 〈모래 시계〉를 제작할 때 김PD 곁에는 늘 ‘환상의 콤비’라고 불린 작가 송지나씨가 있었다.

〈백야 3.98〉의 극본은 작가부터 둘로 나뉘었다. 동명 원작 소설의 저자인 한태훈 교수(46·미국 메릴랜드 주 체사픽 대학 역사학과)와 작가 강은경씨(28)이다. 특히 김종학 PD의 요청에 따라 이야기 틀을 새로 짠 한교수는 미국에 살고 있어 제작진과 호흡을 맞출 수 없었다. 한교수는 지난해 9월 내한해 석 달간 머무르며 9회부터 20회까지의 드라마 극본을 직접 쓰고 돌아갔지만, 강은경씨가 제작 과정에서 각색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 강은경씨는 김종학 PD가 운영하는 ‘제이콤’의 공채 작가 1기생으로 〈백야 3.98〉로 처음 드라마에 입문한 신인이다. 작품을 통해 아직 역량을 검증받지 못한 신인을 대하 드라마 작가로 발탁한 사실부터 대단한 모험이었다. ‘거장’ 연출자와 ‘신출내기’ 작가. 무게 중심이 어느 쪽으로 쏠릴 것인가는 너무나 뻔한 일이다.

한 예로 ‘흑거미’라는 별명으로 암약하는 북한의 테러리스트 권택형 소좌(최민수)가 홀로 중동 반군들의 요새를 초토화하는 신이 극 초반부에 등장한다. 흑거미가 갈겨대는 총탄에 맞아 숱한 반군이 쓰러지지만 그는 총 한 방 맞지 않고 현장에서 유유히 사라진다. 김종학 PD는 ‘람보’나 ‘코만도’ 류의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사용할 법한 액션 신을 선보였다. 원작 소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무모한 장면이었다.

수중 카메라·미니어처 등 특수 촬영 탁월

그같은 부분적 묘사보다 더 심각한 결함은 원작 소설을 재구성하면서 주인공의 성격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흑거미. 원작에서 흑거미는 북한이라는 체제가 낳은 ‘괴물’ 같은 인간으로 그려졌다. 그는 가족의 명예를 저버렸다며 칼을 품은 채 가출한 어머니를 추적하고, 자신을 구박하는 작은아버지를 특무대에 고발하며, 17세 때 자기 뺨을 때린 금발 소녀 아나스타샤를 잊지 못해 죽기 전까지 숱한 금발 매춘부들을 엽기적으로 살해하는 변태 성욕자이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흑거미는 첫사랑 아나스타샤(심은하)를 잊지 못하는 순정파이면서 잔인한 테러리스트로 탈바꿈한다. 그는 아나스타샤를 사이에 두고 한국의 안기부 요원 민경빈(이병헌)과 삼각 관계를 형성한다. 문제는 흑거미가 냉혹한 테러리스트로 변신하는 성장 과정이 완전히 생략되어, 가뜩이나 이해하기 힘든 그의 이중적 성격을 더욱 공감하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데에 있다.

〈백야 3.98〉은 김종학 PD가 시야를 세계 무대로 넓혀 열악한 제작 여건에서도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에서 3개월 이상 현지 로케를 감행하며 만든 대작이다. 완벽주의자답게 수중 카메라나 미니어처, 컴퓨터그래픽을 사용한 특수 촬영 등 장면마다 공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엉성한 이야기 뼈대 위에 연출자의 완벽주의만이 도드라지는 바람에 ‘외화 내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극본의 비중을 새삼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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