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일본 정치 사상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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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5.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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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마사오 저, 김석근 역 <일본 정치 사상사 연구>/급속한 근대화 뿌리 밝혀
일본인들이 쓴 인문·사회계 글들을 보면 기하학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삶이란 것이 그토록 재단하듯 반듯반듯한 것이 아닐 터인데, 인간이나 역사, 또는 모듬살이에 대한 그들의 학술적 저술이나 논문을 보면 상당수가 자로 잰 듯이 마름질되어 있다. 그 공력을 높이 사면서도, 다 읽고 난 다음에는 왠지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것은 마름질의 지나친 반듯함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의 책은 일본인의 삶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원망(願望) 또는 이상을 표현한 것으로 치부하고 읽어야 한다고 진작부터 예단하고 있던 터였다.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서울:통나무)는 그 자체로 고전이다. 고전이란 ‘뚜렷한 주장의 중심이 있으면서도’(重) 여러 모로 해석이 가능한 ‘두터운’(厚) 책이다. 이 책은 일본의 사상 발전사 속에서 서구 근대 사상과의 친화성을 적출해 냄으로써 일본이 재빠른 근대화를 이룩하게 된 까닭을 밝힌 것이다.

20대 후반에 저술

체제면에서 이 책은 정치 사상의 흐름(史)을 논한 책이라기보다는 일본 역사 속의 정치 사상에 대한 문제 중심의 연구서라는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 연구들은 저자가 20대 후반인 40~44년에 완성한 것들이다. 일제 말기 일본 지성계의 ‘근대의 초극’이라는 국수주의적 열풍에 대응하는 문제 의식을 가지고 쓴 정치적 사상서이다.
그는 주자학의 특징인 감화의 정치학을 자연, 다시 말해 전근대의 것으로 괄호 친 다음, 그것을 작위(作爲)의 정치학으로 전환시킨 오규우 소라이(1666~1728)에게서 일본식 근대 사상적 기반을 발견한다. 이 즈음에서 우리는 그의 탁월한 안목에 무릎을 치게 된다. 이미 우리에게 상식화한 ‘주자학=전근대’라는 항등호를 일단 긍정하기만 하면, 그것을 일탈하려 했던, ‘주자학에 대한 안티테제의 집대성자’인 소라이의 근대적 사유의 ‘진보성’에 눈이 부시고, 그 근대성을 발견한 마루야마의 눈썰미에 찬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마루야마가 ‘자연’에서 ‘작위’로의 전환을 이야기하는 배후에 서구 르네상스 시대의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의 패러다임이 전제되어 있음을 곧 발견하게 된다. 마키아벨리가 왜 그 자리에 등장하는가를 유심히 살펴보면 우리는 저자 마루아먀의 트릭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일본식 근대로의 전환 구조를 드라마틱하게 설명하고 난 다음 (곧, 적이 독자들을 감동시킨 다음) 툭 던지듯이 마키아벨리를 인용한다. 이것은 일본식 발전 노선이 결코 일본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서구인 ‘역시’ 그런 노선을 거쳤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과 거꾸로이다. 마루야마는 철저한 헤겔리안으로서 서구적 구도를 가지고(서구 근대 발전사에 대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일본 사상사에 적용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일본 사상사 속에서 ‘자연’히 근대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서구 근대에 대한 연구를 통해 ‘작위’적으로 일본 사상사 속에서 근대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 솎아내려는 핀셋에 오규우 소라이가 안성맞춤으로 지목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루야마의 글쓰기 자체가 작위적이며, 또한 이 점에서 서두에서 말한 일본 책들의 그 기하학적 구성의 표본이 되는 책이다.

김용옥씨의 치열한 해제 돋보여

번역자 김석근은 정치학자이면서 탁월한 일본 연구가로 사계에 정평이 난 사람이라 방대하고 난삽한 책을 번역하기에 적격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이 한글판은 단순한 번역판이 아니다. 그것은 김용옥씨의 치열한 해제 때문이다. 이것은 해제가 아니라 ‘한국 지성의 독립선언서’라고 할 만하다. 마루야마의 흡입력 강한 글을 비판적 안목으로 읽게 만드는 앤티 도트(antidote)로서만이 아니라 그 자체가 마루야마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상의 지평을 잉태하고 있다. 마루야마 패러다임이 대략 반 세기의 소용을 다하고 이제 포스트 마루야마의 패러다임이 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글이라는 것이다.

특히 긴 글을 즐겨 써온 김용옥씨가 짧은 글에서 얼마나 온축된 지성을 담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라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이 해제는 본문과 함께 꼭 밑줄을 그으면서 읽기를 권한다.

裵柄三 (경희대 강사·한국정치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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