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바람 따라잡기 마케팅·경영도 ‘구조조정’
  • 李哲鉉 기자 ()
  • 승인 1998.06.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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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폰·마일리지 제도 인기… ‘아베마 경영’ 등 신개념 경영 각광
올해 취업을 준비하는 이 아무개씨(24)는 외출할 때마다 가방에 쿠폰북을 넣고 다닌다. 아직 취직하지 못해 용돈이 넉넉지 못한 이씨에게 생필품과 각종 문화 상품의 정보와 할인권이 담긴 쿠폰북은 더 없이 유용하다. 이씨는 “쿠폰북은 용돈 지출을 줄일 뿐만 아니라 갖가지 생활 정보와 문화 정보를 담고 있어 큰 도움이 된다”라고 말했다. 최근 신세대 사이에는 쿠폰에 대한 애착을 빗대어‘폰생폰사’(쿠폰에 살고 쿠폰에 죽고)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지금까지 쿠폰은 백화점이나 슈퍼마켓이 단골 고객에게 우송하는 선전지에 끼워져 있거나 피자집·주유소·호텔 같은 몇몇 업체에서만 사용했다. 하지만 올해 들어 컴퓨터통신과 인터넷 사이트에서 배포하는 쿠폰이 나오는가 하면, 쿠폰만 모아 책자로 만든 쿠폰북이 등장했다. 쿠폰을 이용하면 한달에 최고 5만∼6만 원을 절약할 수 있어, 쿠폰으로 물건을 사는 주부가 낯설지 않을 정도이다. 기업은 쿠폰과 쿠폰북을 통해 제품 광고를 하면서 손님을 끌어들일 수 있어, 업종과 관계 없이 앞다투어 쿠폰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지난해 7월 쿠폰클럽이 처음 선보인 쿠폰북은 전국 주요 도시까지 파급되었다. 경제 위기 시대를 맞아 쿠폰이 단순히 할인권에 그치지 않고 보조 화폐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경제 위기가 닥치기 전에는 외면당했던 마일리지 카드도 쿠폰과 함께 최근 각광을 받고 있다. 귀찮아서 가까운 곳을 이용했던 습관을 버리고 할인 카드나 쿠폰을 활용해 마일리지를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가게를 찾는 고객이 늘면서, 그전까지 항공업 부문에서만 활성화했던 마일리지 제도를 여러 업종들이 앞다투어 도입하고 있다. 철도청은 마일리지 실적에 따라 철도 이용 요금을 할인하거나 무료 승차권까지 제공하고 있다. 한국방송공사(KBS)는 방송 광고를 촉진하기 위해 일정액 이상 방송 광고를 한 광고주에게 방송 광고 시간대를 추가로 제공하는 마일리지 방식을 도입했다. 한국PC통신도‘마일리지 하이텔’제도를 신설했다.

쿠폰과 마일리지에 대한 애착에서 볼 수 있듯이, 불황기에는 같은 효용이라면 저가품에 대한 수요가 늘고 고가품에 대한 수요는 줄어드는 것이 보통이다. 96∼97년에는 불황의 여파로 소비자 구매력이 줄기는 했지만 고급품 수요는 감소하지 않았다. 중산층 이상 소비자들이 품위를 생각하고 남의 눈을 의식해 고급 브랜드 제품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 들어서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경제 위기에 처하자 중산층 소비자들이 싼 상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품위보다는 실속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백화점 업계는 이같은 소비자의 행태 변화를 재빨리 파악해 과거 고가 브랜드로 가득 찼던 의류 매장을 지금은 중·저가 의류로 바꾸었다. 또 수입 의류나 비싼 국산 상표는 철수시키고 국내 캐주얼 브랜드를 새로 들였다.

사치성 소비재 수입도 크게 줄었다. 재정경제부가 4월1일 발표한 바에 따르면, 올해 초 사치성 소비재 수입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72.6%나 줄었다. 위스키와 프리미엄급 소주가 일반 소주나 순한 소주에 밀리고 있다. 원액 숙성 기간이 12년이 넘은 프리미엄급 위스키의 매출은 70% 이상 줄었다. 막걸리는 해마다 20% 이상 줄어들다가 올해 1월에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3.7%나 늘었다.
애국심 호소 광고도 ‘봇물’

고가 브랜드와 수입 제품이 따돌림당하는 것은 거품 없이 핵심 효용만을 중시하는 소비 행태가 자리잡아 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주 사용하지 않는 부가 기능을 덧붙여 가격을 올리거나 색상과 디자인만 바꾼 신제품은 더 이상 관심을 끌지 못한다. 소비자들은 필요한 기능만 갖춘 값싼 모델에 눈을 돌리고 있다. 여행이나 외식업체 같은 서비스 업계는 싸고 양이 풍부한 실속형 메뉴를 속속 개발하고 있다. 레저업계도 돈을 들이지 않고 즐기는 시간 소비형 종목에 주목하고 있다.

사치성 소비재 수입이 크게 준 데는 비싸다는 점 외에 외환 위기 이후 애국심과 국수주의가 팽배해진 것도 한몫 했다. 거의 모든 한국 학생들이 등에 짊어졌던 이스트팩 가방이 국산 브랜드인 프로스펙스의 지키미 가방에게 밀려 시장 점유율 정상에서 물러났다. 모닝글로리가 회사 이름 때문에 외국 회사로 오인받아 흑자 부도가 난,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국내 업체들은 토종 브랜드를 강조하는 광고를 게재하고, 외국 업체들은 국산품이라는 느낌을 주거나 한국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기 위한 마케팅 활동을 펼치고 있다. 롯데리아가 ‘우리는 로열티를 물지 않습니다’라는 광고를 인쇄 매체에 싣자, 파파이스는 ‘우리는 순수 토종닭만을 씁니다’라고 응수했다. 로열티도 물고 국산 제품만을 쓰지도 않는 피자헛은 고민 끝에 ‘수익금의 일부를 장애 어린이 돕기에 사용합니다’라는 것을 마케팅 포인트로 선정했다.

하지만 국수주의와 애국심은 일시적인 현상이다. 이미 금 모으기 열풍이 지나간 후 애국 의식은 약해지고 있다. 앞으로 애국심보다 개인의 실리를 추구하게 되고, 국제화가 진척되어 국제 규범이 자리를 잡게 되면, 애국심에 의지한 마케팅 전략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국산품의 정의도 한국 회사가 만든 제품이 아니라 업체의 국적과 관계없이 한국에서 만들어진 제품으로 바뀌고 있는 실정이다.

소비자의 소비 행태 변화에 맞추어 마케팅 개념이 바뀌듯이, 기업 경영도 경제 위기 여파로 크게 바뀐 경제 환경에 적응하려는 경영 기법을 도입하고 있다. 주위 환경과 관계없이 변화를 그대로 기업 안으로 전달하고 자유롭게 변신하는 아메바 경영이 특히 각광받고 있다. 아메바 경영은 의사 결정 체계를 하위 조직으로 분산해, 하위 부서가 거의 독립적으로 예산을 책정하고 사업을 벌이고 그 성과에 따라 부서를 확대하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는 역동적인 조직 운영 기법이다. 세계적인 전기 설비업체인 미국 ABB나 일본 소프트방크가 선보여 큰 성과를 거둔 아메바 경영을 벤치마킹한 사례는 경제 위기 이전에도 많이 있었다. 삼성물산의 테크노밸리, 제일제당의 유레카, LG그룹의 사내 벤처가 대표 사례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신현암 수석연구원은 “국내에 도입된 아메바 경영의 초기 형태는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기업 환경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영 기법을 도입하려는 기업의 노력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또 직장 동료가 사라지고 경쟁자만 남는 조직 풍토가 뚜렷해지고 있다. 기업 처지에서 보면 중요한 프로젝트라도 개별 사원이 큰 빛을 보지 못하면 열심히 일하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사업이라도 그 사업을 수행할 때 개인의 업적이 인정받는 인사고과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기업 경영자들은 사원들을 핵심 인력과 주변 인력으로 나누어 관리해야 한다. 핵심 인력에게는 오랫동안 실무을 통해 역량을 축적할 기회와 좋은 고용 조건을 제시해야 한다. 핵심 인력은 주요 사업 지침을 결정하고 그와 관련된 회사 기밀을 취급한다. 반면 주변 인력은 전문 지식과 능력을 활용하되 기업 환경 변화에 따라 인력 운영을 탄력적으로 할 여지를 만드는 것이다. 인력 이원화는 조직을 유연성 있게 운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회사 기밀이 유출되는 것을 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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