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과 착취의 ‘신화’ 깨기
  • 권수현 (한국여성민우회 가족과성상담소 연구부장) ()
  • 승인 2002.04.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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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슬린 배리 지음 <섹슈얼리티의 매춘화>/매매춘 문제에 새 이론 제시



'보지야, 알바 할래?’ 이것은 내가 PC통신을 처음 시작하던 시절 익명의 남자 아이디로부터 받은 쪽지였다. 나는 나라는 존재 전체가 ‘보지’와 동일시된다는 것, 그리고 내가 단지 남성의 성적 욕망을 배출하는 쓰레기통처럼 취급되었다는 것에 분노했고, 또한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던 매춘 여성으로 취급되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여성이었다는 점, 그리고 PC통신이라는 공간에 있었다는 점이 내가 매춘 여성으로 간주되는 데 필요한 전부였다.


대학원 시절 처음 캐슬린 배리의 <섹슈얼리티의 매춘화(the prostitution of sexuality)>를 접했을 때, 나는 여성으로서 나의 개인적 경험이 어떻게 전지구적 여성 매매, 현대판 노예제도인 매매춘과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일반 여성과 매춘 여성을 구분하는 논리가 어떻게 모든 성적 폭력과 착취를 가능하게 하는 신화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최근 번역된 <섹슈얼리티의 매춘화>(정금나·김은정 옮김, 삼인 펴냄)의 통찰력과 창의성은 학자로서의 학문적 탐구 정신뿐만 아니라 30년 이상 성매매를 반대해온 저자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또한 저자의 미덕은 그녀의 주장이 학문적 열정뿐만 아니라 매춘 여성을 포함한 여성 일반에 대한 깊고 헌신적인 애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은 모든 여성의 삶에 매매춘이 얼마나 깊이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이것이 ‘여성의 인권’이라는 차원에서 갖는 함의가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데 새로운 이론과 분석을 제시한다.


베트남 참전 군인보다 더 큰 후유증 겪어




저자는 오랜 현장 경험과 학문적 고민의 치열함을 통해 매매춘에 관한 통념인 ‘자발적 매매춘’과 ‘강제적 매매춘’의 구분 논리가 매매춘이 존재하는 원인을 개인 여성의 문제로 환원해 매매춘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즉, 매매춘은 ‘여성이 매춘을 원하는가’ 혹은 ‘매춘을 강요당하는가’에 기반을 두고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매매춘은 여성과 여성의 성이 남성의 권력에 의해 가치매김을 당하는 성담론과, 포주들이 이른바 ‘보지 장사’라고 부르는 거대한 성산업에서 이득을 보는 자들(고객·포주 및 중간 착취자), 국가 권력 등 이 모든 것이 총체적 시스템으로 작용하여 유지되고 확대된다는 것이다.


매매춘 문제를 인권 문제, 인간 조건의 문제로 사고하기 위해서는 매매춘을 사람을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것을 경험한 베트남 참전 군인보다 더욱 극심한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보인다는 매춘 여성의 경험을 통해 바라보아야 한다. 저자가 ‘비인간화의 단계들’이라고 말한 매춘 여성의 성적 착취 경험은 성폭력 피해자(생존자)들이 겪는 후유증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매춘 여성 개인의 삶의 역사를 통해서 보면 매춘은 결코 ‘자발적 선택’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끊임없이 성적 대상이 되고 일상적인 폭력의 가능성 속에서 생존해야 했던 경험 속에 바로 그녀가 ‘보지’라는 탈인간화한 성적 대상, 물건이나 상품으로 취급되게 되는 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수많은 매춘 여성과의 인터뷰를 통해 여성이 매춘에 유입되는 과정, 탈매춘이 불가능한 매춘의 과정, 그리고 탈매춘을 하는 과정이 일련의 성폭력 연속선에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책은 최근 군산 화재로 인한 참사와 원조 교제 등으로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기 시작한 매매춘 문제를 인권과 성적 착취의 문제로 바라보고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과 방향들을 제시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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