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공간-현실세계 하나로 섞여 넘나든다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2.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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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선이동통신 예술가들이 시연한 네트워크 사회의 미래


"나는 카메라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 스티브 만 교수는 눈이 아닌 카메라 렌즈로 세상을 바라본다. 오른쪽 눈 위에 달린 카메라로 찍은 영상을 선글라스처럼 생긴 아이탭 스크린에 비추어 본다.


MIT 대학에서 ‘착용 가능한 컴퓨터(weara-ble computer)’를 전공하며 자신의 몸을 실험 도구로 삼기 시작한 이후 그는 온갖 무선 전자장치로 온몸을 무장했다. 심지어 일부 신체 장기에도 전자 장비를 이식해 놓았다. 공상과학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이런 차림으로 무려 20년 넘게 살아온 그는 꾸준한 업그레이드로 가장 진화한 사이보그가 되었다.

스티브 만에게 사이보그로서의 삶은 과학적 탐구 작업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미래 사회 인간의 삶에 대한 베타버전(시범 서비스)이 되어보는 퍼포먼스(행위 예술)를 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스티브 만처럼 무선 이동통신 기술을 이용해 예술 활동을 하는 예술가들을 무선 이동통신 예술가라고 한다. 주로 무선 인터넷이 가능한 핸드폰과 PDA를 이용하는 무선 이동통신 예술(wireless art)은 국내에서는 생소하지만 외국에서는 이미 예술의 한 영역으로 자리 잡은 장르이다.


아트센터 나비는 9월5·6일 무선 이동통신 예술과 관련한 국제 심포지엄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열었다. 심포지엄에는 스티브 만 외에 세계적으로 주목되고 있는 무선 이동통신 예술가 피오나 라비와 모리스 베나윤이 참여해 자신의 작품 세계를 설명했다.


“내키지 않아도 미래에는 모두가 사이보그”


심포지엄에서 스티브 만은 원격 화상 기술을 이용해 토론토의 연구실에서 강의를 진행했다. 원격 강의를 한 것은 그가 비행기를 타지 못하기 때문이다. 9·11 테러 이후 비행기에 탑승하려다 보안 문제로 공항 관계자들에게 장비를 압수당한 뒤 ‘마치 거세를 당한 듯한’ 정신적 충격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


스티브 만은 사이보그가 되는 것이 내키지 않을지라도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가 맞이해야 할 상황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오감이 느끼는 것은 전자기파로 바뀌어 전자 신호로 입력될 것이고 우리의 행동 역시 전자기파로 바뀌어 표현되리라는 것이다. 전자기파를 이용한 제6의 감각, 제7의 감각이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하게 만들리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영국 왕립 예술대학 건축과 수석연구원인 피오나 라비 역시 스티브 만과 마찬가지로 제6의 감각을 탐구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스케치할 곳을 찾아 나서는 평범한 화가처럼 그도 작품 대상을 물색하기 위해 시내를 배회한다. 그러나 이젤과 캔버스 대신 그가 가지고 다니는 것은 가우스 미터나 디어 스캐너 같은 디지털 장비이다. 그에게는 시내 곳곳에 널린 다양한 전자기파를 읽어내는 것이 예술 작업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미국대사관 뒤뜰에 앉아 각종 전자 신호를 잡아내고 베이비 컴스라는 아기 울음소리 경보기가 설치된 집에서 잡아낸 소리로 밑그림을 그리는데, 제6감으로 관찰한 도시의 풍경은 훨씬 구체적이다. 제6감은 물리적 장벽을 뚫지 못하지만 전자기파를 잡아내는 데는 아무런 제약이 없기 때문이다.


피오나 라비의 프로젝트는 주로 사이버 세계와 현실 세계를 결합한 것인데 전자기파로 환원된 정보는 두 세계의 소통을 가능하게 만든다. 전자기파 신호를 바탕으로 그는 가상의 런던과 실제 런던을 포개어 보았다. 이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사이버 미팅 게임에서 이상형으로 설정해 놓은 사람이 실제로 근처에 나타나면 자동 경보가 울리고, 핸드폰 초기 화면에 설정해 놓은 꽃은 사용자가 위치한 공간의 정보를 읽고 그 성격에 따라 피거나 진다.


가상공간 예술(virtual art) 전문 작가인 모리스 베나윤도 무선 이동통신 기술을 자신의 작품 활동에 접목한 예술가이다. 가상 공간에서 인간의 실존 문제를 탐구했던 그는 이번 심포지엄에서 자신의 최초 무선 이동통신 예술 작품인 <조심해(watch out)>를 선보였다.


아트센터 나비 갤러리와 TTL존에 설치된 <조심해>는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설계된 조그만 상자이다. 상자 안에는 사람들이 보낸 메시지들이 끝없이 흐른다. 메시지를 바라보는 눈은 카메라에 잡혀서 곧바로 대형 스크린에 공개된다. 이 작품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감시자도 감시당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는 정보화 사회가 단순한 판옵티콘(원형 감옥)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무선 이동통신 예술가 3인의 강의는 모바일 기술을 찬양하는 부흥회로 끝이 났다. 이에 대해 심포지엄을 기획한 큐레이터 김지선씨는 “무선 이동통신 문화가 아직 시작 단계여서 작가들이 반성적인 접근보다 실험적인 접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라고 분석했다. 이후 벌어진 자유 토론에서도 대부분의 학자들은 미래 사회에 대해 주로 장밋빛 전망을 내놓았다.


이런 유토피아적 시각에 유일하게 이의를 제기한 학자는 ‘몸의 철학’을 주창하고 있는 정화열 교수(미국 모라이언 대학·정치학과)였다. 미래 사회에 대한 이런 낙관적 인식이 구미적 합리주의에 근거하고 있다며 그는 ‘사람이 일상적으로 기계를 사용하면 그 마음 또한 기계처럼 된다’는 장자의 말을 인용해 우려를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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