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편에 선 영화계 ‘유통망 실험’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4.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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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 따라 제각각 골라 보는 재미 커요”
영화는 많은데 볼 영화가 없다고 투덜대는 관객, 혹은 보고 싶은 영화를 발견해도 너무 일찍 간판이 내려져 허탕을 치거나, 아예 주위에 상영관이 없어 애를 먹은 경험이 있는 관객이라면 반가워할 움직임이 활발하다.

최근 신호탄을 쏘아올린 곳은, 새로운 배급망을 자처하는 ‘시네 休’ 프로젝트 팀이다. 영화를 수입하는 회사와 이 영화를 상영할 극장들이 보조를 맞추는 프로그램으로, 영화 수입사(스폰지)와, 이 수입사에 돈을 대는 투자사(KTB 네트워크), 그 영화들을 상영할 극장들(총 6개관)이 공동 보조를 선언한 것이다. 이들이 첫 프로그램으로 택한 작품은 스페인 알모도바르 감독의 새 영화 <나쁜 교육>이다. 그 밖에 기타노 다케시 등 유명세가 있는 감독의 최근작을 중심으로 상영작 여섯 편을 확정했다.

멀티 플렉스 극장들도 공동 보조

이들의 움직임이 관심을 끄는 것은 공동 보조를 약속한 극장 가운데 멀티 플렉스 극장이 다수 끼어 있다는 점 때문이다. 최근 덩지 큰 몇몇 작품이 스크린을 싹쓸이하는 문화가 멀티 플렉스 극장들의 몰아치기 상영 탓이라는 눈총을 받아왔다. 사실 흥행이 될 것 같은 영화에 스크린을 서너 개씩 몰아주는 관행은, 극장으로서는 점유율을 높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전략이다.

하지만 당초 멀티 플렉스를 통해 다양한 선택권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관객으로서는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멀티 플렉스들이 다양한 영화에 문호를 개방하겠다는 선언은 일단 반갑게 받아들여진다. ‘병 주고 약 주기’ 혹은 ‘면피용’이 아니냐는 시선도 있지만, 지속적으로 운영될 경우 관객과의 접촉면을 넓히는 데는 더없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예상만큼 관객이 확보되지 않을 때 몸집이 큰 극장들로서는 오히려 운신할 폭이 줄어들 수 있다. 파급력이 큰 대신 안정성은 미지수인 것이다.

예술 영화 전용관 지원 프로그램인 ‘아트 플러스’ 시네마 네트워크도 시행 2년째를 맞아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아트 플러스 네트워크는 전체 상영 일수의 5분의 3을 예술 영화를 상영하도록 유도하면서 지원책으로 좌석 수를 기준으로 극장운영비를 지원하는 영화진흥위원회의 공식적인 지원 프로그램이다. 현재 이 체인망에 속한 극장은 전국에 여덟 곳이며 하반기에 몇몇 극장이 추가된다. 서울에서는 하이퍼텍 나다·씨어터 2.0 등이 속해 있고, 지방에서는 멀티 플렉스 극장들이 한 관씩 떼어내어 이 체인망에 가입하고 있다.

서울의 하이퍼텍 나다는 이 가운데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곳이다. 이 곳은 다큐멘터리 <영매>를 통해 대안 유통망으로서의 가능성을 확인했고, 이어 비전향 장기수를 다룬 다큐멘터리 <송환>을 아트 플러스 배급 1호로 상영하는 데 길잡이 노릇을 톡톡히 했다. 두 작품을 두루 극장에 걸었던 동숭시네마텍의 정유정 대리는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누구나 입소문을 낼 만큼 작품이 좋았고, 기존 유통망이 너무 경직되어 있었다. 두 가지 요소가 맞물리면서 이런 ‘작은 대박’이 가능했다”라고 분석했다.

아트 플러스의 가장 큰 의무 사항은 한국 예술 영화 쿼터이다. 한국 극장이라면 어느 곳이나 지켜야 하는 스크린 쿼터 상영 일수는 물론, 전체 상영일 가운데 5분의 3을 예술 영화로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단 이때 예술 영화란, 상업 유통망을 타더라도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품들까지 폭넓게 인정한다.

하지만 아무리 폭을 넓게 잡아도, 한국 예술 영화 쿼터를 감당하기에는 영화 편수가 절대 부족하다. 그 덕에 신인 감독들의 다양한 기획전과 회고전이 열릴 수 있지만, 흡인력 있는 작품들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현실에서는 버거운 제약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올해 가을에는 전국 8개 극장이 한국 영화 열세 편을 릴레이 상영하는 행사에 돌입한다. ‘아트 플러스의 선택 2004 하나 더 +’라는 제목으로 8월27일부터 10월7일까지 진행되며, 상영작 대부분은 2000년 이후 최근작으로 미개봉 작품이 많다.

지난해 이 체인망에 속해 운영하다가 올해부터 빠지게 된 극장 씨네큐브는 취향과 색깔 면에서 예술 영화 전용관이라고 불릴 만한 곳이면서도 시장에서의 정면 승부를 택해 새로운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씨네큐브는 현재 (주)백두대간이 위탁 운영하고 있다. 이광모 감독의 백두대간은, 대학로에서 동숭시네마텍과 보조를 맞출 때부터 대안 유통망을 모색해온 곳이다. 프랑스 영화 <타인의 취향>을 비롯해, 에스키모 영화 <아타나주아> 등이 이 곳만의 작은 대박 영화들이다.

최근 무삭제 영화로 화제가 된 <팻 걸>을 원판 그대로 내걸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수입자이자 극장 운영자인 백두대간의 김은경 이사는 “다른 곳도 아닌 우리 극장에서 영화를 자르면서 상영하겠다고 하면 우리 관객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이 극장의 관객들에게 신뢰감을 표시했다.
씨네큐브가 아트 플러스 네트워크에서 빠져나와 시장에서의 생존을 택한 데는 관객에 대한 믿음도 한몫 했다. 보는 눈이 달라, 오히려 다른 영화관의 흥행작은 파리를 날리기가 일쑤라는 것이다. 지난해 한 한국 영화를 상영할 때는 관객이 한 명도 들지 않아 영사기를 돌리지 못한 적도 있다. 또 <태극기 휘날리며>와 같은 대박 영화라고 해서 무조건 잘 되는 것도 아니다. 관계자는 서울 시내에서 가장 먼저 간판을 내린 극장에 속할 것이라고 귀띔한다.

이와 같은 사례는 씨네큐브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영화를 볼 수 있는 공간’으로 뿌리를 내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깐깐한 관객들이 오히려 든든한 자양이 되는 것이다. 김이사는 “영화가 성에 차지 않는다며 환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고정 관객’이 많고, 극장이 선택하는 영화에 대한 기대치가 높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으로 이해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 극장의 연간 관객 수는 20만명. 현재 회원만 3만명이다. 회원이 5만명으로 늘어나면 목표치 30만명은 무난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하반기부터는 다양한 회원 프로그램을 제공할 계획이다. 최근 진행한 여름 영화학교가 그 시발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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