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입법 후퇴를 우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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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7.0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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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청장의 안기부 요직 기용과 함께 안기부법 개정은 음습한 골방에서 도모했던 지역 감정 및 용공 조작을 법과 제도로 뒷받침할 위험성이 있다.”
한때 나는 새도 떨어뜨린 안기부가 세밑 정국에 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안기부가 주도한 안기부법 개정안을 둘러싼 여야의 극한 대립(12월18일)에 이어 최각규 강원도지사의 석연찮은 탈당(19일)과 이른바 초원복국집에서 노골적으로 지역 감정을 부추긴 바 있는 박일룡 경찰청장이 안기부 제1차장에 임명(20일)된 파문까지 겹치는 바람에 세밑 정국이 꽁꽁 얼어붙은 것이다.

문제는 이같은 일련의 사건들이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작용되고 있다는 의혹이다. 다름 아닌 공작 정치의 망령이다. 신한국당의 극력 부인에도 불구하고, 국민회의가 성명에서 ‘강압과 회유에 의한 한날 한시의 집단 탈당은 전형적인 독재 정권의 공작 정치 수법이다’라고 유례없이 강하게 규탄하고 나선 것도 그런 기미를 감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물론 이 사건들이 야당이 주장하는 공작 정치의 결과라는 물증은 없다. ‘한날 한시의 집단 탈당’은 맞지만 그것이 ‘강압과 회유에 의한 것’이라는 증거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당 파괴’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씨를 뿌린 지 몇년이 채 되지 않은 지방자치제도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지자제 파괴’ 현상이다. 이같은 지자제 파괴 현상은 97년 대선을 앞두고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고질병인 지역 감정을 더 도지게 할 뿐이다.

초원복국집 기관장 모임은 그런 점에서 공직 사회의 추악한 단면뿐만 아니라 중앙 집권제의 폐단을 유감없이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른바 지역 기관장이라는 사람들이 공개된 자리에서는 망국적 지역 감정을 철폐하고 공직자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지만 음습한 골방에서는 지역 감정을 노골적으로 부추겨 특정 지역의 정권 승계를 음모하는 광경이야말로 공직 사회의 이중성을 유감 없이 드러낸 증표였다.

따라서 그 골방에 모인 사람들은 공직에서 추방되어야 마땅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복국집 모임의 당사자이자 자신의 경남고 후배인 당시 박일룡 부산지방경찰청장을 서울지방경찰청장에 이어 경찰청장으로 영전시키더니 이번에는 국내 정보를 총괄하는 안기부 제1차장으로 임명했다. 벌을 주어야 마땅한 사람한테 상을 준 셈이다. 더욱이 박씨는 경찰청장 재임 중에도 경찰 중립화 반대 지휘서신 하달 등으로 정치 개입 의혹을 야기했다.

개정에 반대하면 ‘북한에 동조’인가

안기부법 개정은 바로 그러한 음습한 골방에서 도모했던 지역 감정 및 용공 조작을 법과 제도로 뒷받침할 위험성이 있다. 그것은 이미 ‘중대하고 개연성 있는 위험성’의 수준을 넘어 ‘명백하고도 현저한 위험성’을 띠고 있다. 그러한 위험성은 ‘안기부법 개정’이라는 가치중립적인 사안의 표현을 ‘간첩 잡는 법’이라고 지칭하며, 색깔론의 구도 속으로 여론 몰이하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새롭게 개정하지 않아도 안기부는 이미 간첩 잡는 데 필요한 수사권을 보유하고 있고, 안기부가 부활시키려는 국가보안법상의 찬양·고무죄(제7조)와 불고지죄(제10조) 수사는 검찰과 경찰이 맡고 있다.

하나의 사안을 보는 시각은 여야가 다르고, 관민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안기부가 개정 여론을 조성하려고 제작·배포한 홍보물(안기부법 개정의 필요성)에서 ‘친북 세력 척결을 위한 안기부법 개정에 대해서는 북한의 주의·주장에 동조하거나 이를 비호하는 반국가 사범 등 극소수를 제외하면 이의가 없을 것으로 확신한다’라고 못박은 데에는 문제가 있다. 안기부의 논리에 따르면, ‘안기부법 개정 반대=북한의 주의·주장 동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헌법에 보장된 의사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 3년 전에 여야 만장 일치로 통과시킨 ‘문민 개혁의 대표적 성과물’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통합선거법과 함께 개혁 입법의 핵심으로서 문민 시대에 대한 믿음을 주었던 입법 성과를 다시 후퇴시키려는 데 우려를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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