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의 ‘진짜 경제학’
  • 고미숙 (고전 평론가) ()
  • 승인 2004.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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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받음을 통해 행복한 관계가 열릴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것이 다 선물이 된다. 화폐법칙의 회로를 벗어나 예기치 않은 삶의 파동들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바로 선물의 참된 경제학이다.”
‘축제와 기념의 계절’ 5월이 지나가고 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과 부처님오신날.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가족과 역사, 종교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기념일이 이 5월에 모여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어디 이뿐인가. 대학의 축제도 대부분 5월에 치러지는 걸 염두에 두면 그야말로 ‘곳곳에 축제요, 날마나 잔치’의 퍼레이드인 셈이다.

그래서 행복했는가? 이 뜨거운 ‘봄의 향연’으로 사랑과 우정, 그리고 삶의 풍요를 만끽했는가? 이 물음에 선뜻 ‘그렇다’고 답할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는커녕 많은 사람들은 손사래를 치며 ‘5월의 잔인함’을 성토하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참, 어이없는 일 아닌가. 축제란 본디 일상의 타성으로부터 탈주하여 삶을 한껏 고양시키기 위해 선택된 ‘아주 특별한 시간’인데, 오히려 축제로 인해 삶이 이렇게 고달파지다니. 대체 어떻게 이런 역설이 가능하단 말인가?

일차적으로는 축제가 전적으로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한 의무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과 부모님, 그리고 선생님에 대한 의무, 혹은 역사적·종교적 의무. 그리고 그때 의무란 대개 어떤 종류의 선물(혹은 부채)로 귀결된다. 즉, 기념일이란 특정 대상에게 어떤 선물을 하는 날로 압축되어 버린다. 그러니 기념일이 많을수록 사람들의 마음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지는 거야 당연한 소치 아니겠는가.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선물이라는 아름다운 명사는 참을 수 없이 무겁고 따분한 낱말로 전락하고 말았다. 선물의 전락(?)은 축제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을 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더한층 ‘쿨’(사실은 썰렁하게)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주고받는 즉시, 고스란히 화폐적 교환법칙의 회로에 갇혀버리기 때문이다. 선물이라면 가장 먼저 뇌물을 떠올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주는 만큼 받고, 받는 만큼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부채감에 시달리는 게 자연스런 현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자. 선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정의 무기이자 가장 아름다운 전략이다. 둘 사이든 그 이상이든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능동적으로 만들어 가는 능력의 표현이 바로 선물인 것이다. 따라서 선물을 규정하는 일차적인 속성은, 대상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배려이다. 베푸는 손이 될 것인가, 내미는 손이 될 것인가? 참고로 인디언 부족에서는 추장이 되는 요건이 선물을 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즉 ‘축제를 베푸는 손’이야말로 카리스마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생명의 본질은 ‘네트워킹’이다. 우리의 삶은 무한히 이어지는 인연의 그물망 속에서만 존재 가능하다. 선물이란 바로 그 네트워킹에 동참하는 기회이자 훈련이다. 모든 것이 다 선물일 수 있는 원리도 거기에 있다. 주고받음을 통해 행복한 관계가 열릴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것이 다 선물이 된다. 돈이든, 먹거리든, 물건이든 혹은 유머든. 아무것도 줄 게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고, 받을 게 전혀 없을 만큼 부자인 사람도 없는 법이다. 시작도 끝도 없이, 주체도 대상도 없이 이어지는 무한한 흐름! 화폐법칙의 회로를 벗어나 예기치 않은 삶의 파동들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바로 선물의 진짜 경제학이다.

그런 점에서 선물을 주고받는 훈련은 매순간 이루어져야 한다. 가족과 친구, 연인 사이뿐 아니라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도. 또 크건 작건, 유형·무형에 관계없이. 선물을 둘러싼 배치를 이렇게 바꿀 수 있다면, 숱한 기념일들을 그저 의무 방어를 하는 수렁에서 건져내 축제의 장으로 변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나날의 일상 자체가 축제이자 선물이 되는 ‘역전’도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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