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제1 야당의 정략적 보수화를 우려한다
  • ()
  • 승인 1995.09.1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보수로 선회한 제1 야당이 진실로 보수해야 할 가치 위에서 보수주의의 건강성을 건설하지 못한다면, 그 보수주의는 타락한 가치와의 타협에 불과할 것이다.”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가 제1 야당으로서 정치 세력을 구축하였다. 정치권의 부정한 정치자금 조달 관행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사법적 논리와 정치적 공세의 구획이 뒤섞여 가면서 점차 정쟁의 양상으로 전개되어 가고 있고, 새로운 제1 야당은 9월5일 창당대회에서 선포한 강령을 통해 보수주의적이고도 방어적인 정치 노선으로 선회하였다. 이로써 적어도 국회에 참여하는 기성 정치권 안에서는 여·야의 현실 인식과 정치적 지향성의 차이를 말한다는 것이 전적으로 무의미해 보인다. 동일한 현실관과 미래관을 제시하는 보수 정당 사이에서의 정치 관계는 정책적 차별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이 더욱 파괴적이고도 소모적인 정쟁으로 치닫고 있다(커버 스토리 참조).

이러한 싸움의 구도 속에서 제1 야당의 보수주의 전환은, 여당에게나 야당에게나, 정당이 정치 권력의 힘으로 지켜내야 하고 가꾸어 내야 하는 보수적 가치의 건강성을 망각케 하고 있다는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재벌의 자율성을 최대한으로 보장하고, 재벌의 반국민경제적 경영 행태를 공정거래법으로 대처해 나가겠다는 새정치국민회의의 경제 정책 속에서도 보수를 표방한 정당이 수호해야 할 보수적 가치의 혼란이 엿보인다.

가치 혼란 드러낸 ‘재벌 자율성 옹호’ 정책

자본의 원초적 형성과 축적, 소유의 집중과 팽창, 그리고 이윤 극대화의 길이 재벌과 군사 정권과의 공생 관계 위에 전개되어 온 역사 속에서, 재벌의 내부 거래와 계열사 간의 상호 신용보증에 의한 집중과 팽창을 공정거래법으로 규제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은 한국 경제의 오랜 체험에 의해 입증되어 있다. 공정거래법이 무의미해진 배경은, 제1 야당의 인식과는 달리 ‘재벌의 자율성’이 훼손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재벌에 대한 ‘국가의 자율성’이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벌의 권력은 전적으로 소유에 근거하지만 국가의 권력은 비록 군사 독재라 하더라도 민의에 의한 견제를 끝끝내 회피하지 못한다. 재벌의 소유 권력은 국가의 정치 권력보다 더욱 강고한 것일 수도 있지만, 국가는 재벌의 이윤보다 더 큰 보수적 가치를 끌어안고 있다. 그러므로 보수로 전환한 제1 야당이보수 정당으로서 옹호해야 할 보수적 가치는, 재벌의 자율성이기 이전에 국가의 자율성이 되어야 옳을 것이다.

변형근로제 입법 추진으로 정부와 노동계는 일촉 즉발 위기에서 첨예하게 맞서 있다. 노동과 기업의 이해 관계 대립에서, 노동자의 불이익과 기업의 횡포를 방치하는 것이 보수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재벌의 시대적 리더십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이 진보주의가 아니며, 진보와 보수 사이에 주저앉아 있는 기회주의적 입장이 중도주의가 될 수 없는 이유와 같다.

김대중 총재가 영도하는 정치 세력이 국가보안법에 대해 보여준 정치적 입장은 과거 평민당 시절의 ‘철폐’ 주장에서 이제는 ‘존치’라는 방향으로 급선회하였다. 보안법 철폐 주장이 의미 있는 진보주의가 아니었듯이 보안법 존치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도 현실의 삶을 통과해 나온 보수주의는 아닌 듯하다. 보안법과 관련된 이 시대의 실존적 괴로움은 북한의 대남 정책과 연동해서 이 법을 폐지해야 하느냐 존속시켜야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법 조문의 광범위한 해석과 집행 기관의 권력 남용을 스스로 규제할 수 있는 자기 기율을 방기함으로써 법적 정당성을 상실해온 역사 속에 있다. 북한의 호전성이 계속되고 있다는 이유로, 국내에서 발효되는 국가보안법의 광범위한 해석과 작위적 적용을 규제하기를 단념하는 정책은 ‘보수주의’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제1 야당의 집권 전략은 전통적 고정표인 30% 득표율에 5~6%를 추가함으로써 대권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보수로의 선회가 제1 야당에게 그같은 추가표를 가져다 줄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보수로 선회한 제1 야당이 진실로 보수해야 할 가치 위에서 보수주의의 건강성을 건설하지 못한다면, 그 보수주의는 정치적 리더십이 아니라 타락한 가치와의 타협에 불과할 것이다.

국가와 재벌의 관계, 재벌과 노동자와의 관계를 국민 경제의 이상에 부합하게 설정하는 정책적 작용이나, 국가보안법의 해석과 적용과 집행을 헌법의 이념 밑에 엄격히 복속시키는 상식적인 일들을 정치적 리더십의 영역 밖으로 몰아내는 노선은 ‘보수주의’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아무런 ‘주의’도 아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