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법은 ‘상상력’의 적이다
  • 진중권 (문화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 승인 2004.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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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상상하는 것이 힘이다. 그런데도 ‘죽은’ 국보법이 살아 있다고 우기는 이들을 보면 국보법의 내적 검열에 집착하는 시대착오적 몸부림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는 주로 ‘인권’ 차원에서 논의되어 왔다. 관점을 바꾸어 좀 다른 측면에서 접근해 보자. 내가 보기에 오늘날 국보법은 사회의 생산력을 저해하는 족쇄가 되었다. 과거에는 단순히 생산 요소를 양적으로 투입하는 것만으로도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생각을 하는 데 필요한 자유 없이 ‘까라면 까라’는 명령을 받아 몸을 굴리는 군대식 규율만으로도 어느 정도 성장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규율이 효율이었던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났다.

과거에는 ‘아는 것이 힘’이었다면, 미래에는 ‘상상하는 것이 힘’이 될 것이다. 미래의 생산은 이미 있는 것을 찍어내는 효율이 아니라 아직 없는 것을 실현하는 창조성을 지향한다. 아직 없는 것을 떠올리는 능력을 상상력이라고 부른다. 그 상상력이 이제 생산의 주요한 형태가 되고 있다.

저발전국은 맨몸으로 땅을 일구고, 개발도상국은 수입 기계로 물건을 찍고, 발전한 나라에서는 그 기계를 ‘디자인’한다. 개발도상국이 이미 있는 기계로 생산을 한다면, 선진국은 아직 없는 기계를 꿈꾼다. 1억 달러 값어치를 갖기 위해 중국 공산품은 수만 t 무게를 가져야 하나, 같은 값의 소프트웨어는 달랑 1t이 안 나갈 수가 있다. 왜? 상상력에는 무게가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경제적 빈곤은 상상력 빈곤에서 비롯될 것이다. 그런데 국보법은 상상력을 제약한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사회의 빈곤을 영속화한다.

국보법이 그저 이념의 문제라고? 그렇지 않다. 국보법의 억압은 전 사회를 주눅 들게 하고 있다. 가령 저들이 뭐라 하던가. 호주제 폐지도 빨간 색이고, 성매매 금지도 반시장적이고, 사립학교법도 반체제적이며, 언론 개혁도 사회주의 정책이라 하지 않던가. 저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색깔론은 이렇게 영역의 구별 없이 상상력을 억제하는 폭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마디로 국보법은 사회의 모든 곳에서 도처에서 더 나은 사회의 꿈을 짓밟고 있다.

요즘 한국 영화가 잘 나가는 모양이다. 남북의 화해를 얘기한 <쉬리>, 남북한 병사의 우정을 노래한 , 공공연히 적기가가 불려지는 <실미도>는 1970~1980년대라면 아마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국보법이 행사하는 억압은 창작자들의 내면에 내적 검열의 기제를 만들어낸다. 조금 전 텔레비전을 보니 영화상을 받은 <올드 보이>의 제작자가 수상 소감 첫 마디로 ‘영상물 등급위원회에 감사’했다. 내막은 모르겠으나, 등급위원회에서 영화 제작을 도와주는 방식은 단 하나, 딴죽을 걸지 않는 것뿐이다. 한마디로 근친상간 부분을 문제 삼지 않아 고맙다는 얘기이리라.

열린 사회의 생산력 없으면 도태는 필연

상상력은 지금 없는 것을 떠올리는 능력이고, 지금 금지된 것을 소망하는 용기이며, 지배적인 통념을 뒤엎어 버리는 반역이다. 종종 정치적 해방에 이어 예술적 창조력의 폭발이 일어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상상력이 생산력이 되는 시대에 박정희식 근대화는 더 이상 미래의 전망일 수 없다. 미래는 예술가형 인간의 시대다. 아직 없는 것을 상상하고, 새로운 욕망을 디자인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프로그램을 짜는 능력, 이것이 열린 사회의 생산력이다. 이것을 갖지 못한 자, 도태될 것이다.

한나라당이 국가보안법에 목숨 걸었다. 수십 년 동안 자기들을 거저 먹여주었던 존재, 그러니 국보법이 부모나 다름없을 게다. 하지만 그 지극한 효심(?)이 정도를 넘어 시체 선호증(네크로필리아)으로 발전한 것처럼 보인다. 이미 죽은 국보법이 살아있다고 우기는 이들의 몸부림을 보면, 언젠가 무덤에서 시체를 파다가 생수를 바르며 부활을 기원하던 영생교도들이 생각난다. 21세기에 국보법을 되살리려 하다니, 썩은 시체에 맹물 발라가며 시청앞 광장에서 통성 기도를 올린다고 시체가 되살아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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