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장 실질 심사제 도입 주역 박형남 판사 “구속 수사 만능 시대 끝났다”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1996.1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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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임의 동행 형식으로 사실상의 불법 체포를 했습니다. 내년부터는 긴급 체포를 제외하고는 영장 없이 사람을 체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 이제까지 보석은 기소 후,
대법원이 내년부터 시행하겠다고 발표한 ‘구속영장 실질 심사제’의 파장이 커지고 있다. 피의자에 대한 구속이 양형 판단에 영향을 미쳐온 현실에 비춰볼 때, 죄의 경중에 관계 없이 증거 인멸 또는 도주 가능성만을 잣대로 구속 여부를 실질 심사하겠다는 법원 방침은 그만큼 혁명적이다. <시사저널〉은 새 인신구속제 성안 작업의 핵심 실무를 맡았던 박형남 판사를 만났다. 인신 구속 남용 방지에 관한 한, 법원 안에서조차 강경파로 통하는 박판사는 “법치주의를 확립하는 측면에서 이번 결정은 오히려 미흡한 대목이 있다”라며 그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구속영장실질심사제는 우리 사법사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나라에 영장 제도가 도입된 때는 광복 이후로서, 형사소송법에 관계 규정이 명문화한 54년을 기점으로 잡습니다. 세계 어느 민주 국가에서도 피의자가 체포되거나 구속될 경우, 일단 판사 앞에 나와 체포 또는 구속의 정당성 여부를 심사받게 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그같은 인신 구속은 경찰이나 검찰이 작성한 수사 기록을 주요 자료로 하는 형식적 심사가 일반적이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법관 수가 크게 부족하고, 심사가 주로 야간에 이뤄진 탓이 큽니다. 문제는 이같은 형식적 심사가 42년간 존속해 왔다는 것이지요. 법관이 하루에 수십 건씩, 그것도 다른 업무에 쫓기며 영장 심사를 하다 보니 실질 심사가 이뤄지지 못하고, 구속 여부가 양형 기준의 토양이 되는 쪽으로 변질됐습니다. 법원의 이번 결정은 이같은 인신 구속 관행을 원래 취지에 맞게 제자리로 돌려놓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법원이 시행키로 한 새 법규에는 영장실질심사제말고도, 이와 짝을 이루는 다른 제도가 들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내용입니까?

이번에 달라지는 내용에는 영장실질심사제를 포함해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임의 동행 형식으로 사실상의 불법 체포를 했습니다. 내년부터는 긴급 체포를 제외하고는 영장 없이 사람을 체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 이제까지 보석은 기소 후, 즉 범죄 혐의자가 피고인이 된 뒤에만 허용되었으나, 앞으로는 피의자 단계에서 보석 신청이 가능합니다. 무죄 추정 원칙과 불구속 수사 원칙을 살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새로 도입된 제도는 종전 관행에 비춰 볼 때 진일보한 것이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셋 모두 입법론적으로 미흡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예컨대 영장실질심사제만 보더라도 우리 법원은 임의적 심사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는‘법관이 구속영장 심사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 한하여’ 피의자를 심문하는 제도인데, 필요적 심사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제 인권 규약(이른바 B규약)과 배치됩니다. 임의적 심사제는 앞으로 ‘유전유심사(有錢有審査) 무전무심사(無錢無審査)’라는 비난을 부를 소지가 큽니다. 또 하나, 범죄 혐의자를 영장 없이 긴급 체포한 경우라 하더라도 신속히 사후 영장을 받도록 해야 함에도 이 부분 역시 개정 법률에는 빠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인신 구속 관행의 폐해는 어느 정도 심각합니까?

인신 구속이 신체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따라서 인신 구속은 어디까지나 예외가 돼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범죄 혐의자에 대한 인신 구속 빈도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높습니다. 매년 중소 도시 인구와 맞먹는 14만여 명이 수십 일씩 구속되는 나라는 우리나라를 빼고는 찾아 보기 힘듭니다.

불구속 수사·재판 관행을 확립하는 작업이 늦어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기본권 경시 풍조가 주요 원인으로 지적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사회 질서 유지만 강조해 왔지 개인의 기본권은 경시해 왔습니다. 그나마 인권의 최후 보루라 할 법원이 뒤늦게 문제점을 자각하여 91년부터 제도 개선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새 인신 구속 제도의 의의가 큰데도, 수사 당국은 물론 일반 국민 사이에서 새 제도의 부작용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새 제도에 대한 비판은 주로 검·경 등 수사기관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신 구속 절차가 복잡해짐에 따라 인력난이 가중될 것이고, 불구속 범죄자가 늘어 범죄 증가가 예상되며, 교통사고·폭행·재산 범죄 등 긴급을 요하는 범죄의 경우 피해자의 조속 회복이 늦어지는 외에, 기소 중지 사건이 늘어나면서 수사가 장기화한다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새 제도에 쏟아지는 비판의 거개는 기우에 지나지 않습니다. 먼저 업무 과중과 인력난 문제는 새 제도 논의 초기 때부터 지적된 것이었는데, 법원측에서도 사정을 고려해 1년 정도 여유 기간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수사 당국이 준비를 못했다면 변명할 여지가 없을 줄로 압니다. 둘째, 범죄가 증가해 사회 불안 요소를 가중시킨다는 지적이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불구속 원칙이 예외 없이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법원은 살인·강도·강간 등 강력 범죄와, 기타 조직 범죄에 대해서는 기존 관행을 따를 방침입니다. 사회 불안 요소가 증가할까 봐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지만, 법원은 이에 대해서도 대비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불구속으로 석방되고 나면 대체로 실형을 선고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으나, 앞으로는 선고 단계에서 죄질의 경중을 따져 실형을 선고할 부분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실형을 선고할 방침입니다.

그렇더라도 새 제도는 지나치게 법원의 입장에서만 마련되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심지어 언론계 일각에서는 새 제도를 시행하면 법관의 권한이 비대해져, 사법부 개혁이라는 국민적 요구를 오히려 법원측이 역행할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수사가 장기화할 가능성은 법원측으로서도 문제가 되는 부분입니다. 업무 과중 문제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원칙을 관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구속 수사 만능 시대, 구속영장에 대한 형식적 심사 시대는 끝나야 합니다. 이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부과되는 부담의 크기는 검찰에나 법원에나 똑같이 적용됩니다. 일부에서는 예비판사제 시행이 1년 유보된 것을 들어 사법부가 자기 개혁 노력에는 소극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이는 사실 관계를 오인한 데서 나온 주장입니다. 예비판사제를 시행하면 1년에 약 백명 가량 재판 인력의 손실이 오는데, 가뜩이나 새 제도 시행으로 영장 전담 법관 수십 명이 필요한 마당에 어떻게 양자를 다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법원이 새 제도를 시행하면서 얼마나 형평성을 발휘할지 의구심을 갖고 있는 국민이 많습니다.

새 제도 시행에 임하는 법원의 입장은 한마디로 ‘인식 전환과 결단 촉구’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과거 나치 시대에는 인신 구속의 잣대로 증거 인멸·도망 가능성 외에 ‘사회적 물의’라는 항목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우리 몸에 밴 잣대는, 구속은 곧 징벌이라는 관념이었습니다. 이는 정식 재판 전에 법 이외의 수단으로 범죄를 재단한다는 점에서 나치 시대의 법 개념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결국 새 제도는 현재의 관행이 잘못되어 있다는 새로운 인식과, 그 잘못을 시정하겠다는 결단을 동시에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실질 심사의 기준인 증거 인멸·도주 가능성의 구체적 조건이 판례로 확립되지 못했다는 부분입니다. 국민의 법 감정이나 형평성 문제가 직접 부딪치는 부분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조건을 일률적으로 정하는 데에는 개별 판결의 독립성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법원 내부의 미묘한 문제가 있어 정답을 찾는 데 뜸이 들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세세한 부분에 대한 평가를 잠시 유보하고, 무죄 추정 원칙과 불구속 수사 원칙을 실현한다는 면에서 바라본다면 새 인신 구속 제도에 대한 국민 의구심의 상당 부분은 쉽게 해소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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