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 대통령 경제특별보좌관 방찬영“북한 개혁, 한국이 도와야 한다”
  • 南文熙 기자 ()
  • 승인 1995.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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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붕괴 위험에 직면하면 김정일은 가차없이 전쟁을 일으킬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북한이 개혁을 통해 체제 자생력을 갖추도록 지원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의 체제·권력·이념에 정통한
방찬영 교수(59)는 매우 특이한 경력을 지닌 사람이다. 연세대 정외과를 거쳐 경제학 석사를 마친 방교수는 77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80년대까지 미국에서 사회주의권 경제를 가르쳤다. 한국인 경제학자로서 옛 소련 지역의 경제 회생 과정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그의 특이한 여정이 시작된 것은 91년부터였다. 옛 소련 언론에 소련 경제 회생책을 기고한 것이 인연이 돼 나제르바에프 카자흐스탄 대통령 경제특별보좌관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사회주의 경제에 관한 한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그에 대해, 경제 회생 방안 마련에 골몰하는 북한 이 주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북한 당국은 외국인도 초청장만 있으면 나진·선봉 지역을 방문할 수 있도록 조처한 뒤 첫번째로 방찬영 교수를 초청했다. 지난 8월10일부터 19일까지 나진·선봉 지역을 둘러보고 돌아온 방교수를 만나 이 지역 개발 현황과 바람직한 대북 정책 방향에 대해 물어보았다.

나진·선봉 지역을 방문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1년 전부터 북한측의 초청이 있었습니다. 북한 당국자들은 카자흐스탄에서 제가 수행한 역할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경험이 북한 경제 회생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이번에 방문하게 된 것은, 나진·선봉 지역을 둘러보고 자문해 달라는 것과, 직접 투자를 유치하는 데 도움을 달라는 요청에 따른 것입니다.

현재 개발 상황은 어떻습니까?

나진·선봉은 수치상으로만 보면 싱가포르보다 큰 지역입니다. 또 지정학적 조건이 좋아 현재도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물동량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북한 당국은 나진·선봉이 제대로 개발되면 매년 10억~20억 달러씩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5년간 실질적으로 개발이 진행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가장 큰 장애 요인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그동안 핵 문제로 인한 국제적 제재 분위기 때문에 외국 기업들의 투자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좀더 실질적인 문제로, 사회간접자본이 갖춰지지 않아 투자 유치가 안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 기업들의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 지역이 경제 특구로 제대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북한 추산으로 약 1백50억달러, 유엔개발계획(UNDP) 추산으로 약 3백억달러의 사회간접자본 투자가 필요한데, 이 정도 자금을 댈 수 있는 곳은 한국밖에 없다는 것을 북한 당국도 알고 있습니다.

북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나라가 한국밖에 없다는 견해가 타당한 것입니까? 북한의 지정학적 조건이나 값싼 노동력 등은 얼마든지 외국 자본을 끌어들일 호재가 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거래하는 것과 투자하는 것은 별개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북한에 제공할 경수로를 둘러싸고 미국이나 다른 나라들이 머리를 싸매고 경쟁하는 것은 거래 문제입니다. 그러나 현금을 투자해 제조업을 한다는 것은 전혀 별개 문제입니다. 우선 앞에서 말한 대로 사회간접자본 등 투자 여건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또 북한의 외교 정책이 친선 외교로 전환돼 외국과 관계 개선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더 본질적인 문제로는 북한 체제의 개혁이 앞서야 한다는 점이지요. 북한 체제에 내재하는 문제점이 개혁되지 않고서는 외국 자본이 북한에 진출해도 기업 활동이 불가능합니다.

북한 체제에 내재하는 모순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회주의 이념의 핵심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를 배제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본을 소유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간의 착취와 피착취 관계를 청산하겠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모든 생산 수단의 국가 소유라는 개념으로 나타났습니다. 국가가 모든 생산 수단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생산 체제는 중앙통제식 계획 경제 체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경제 규모가 커질수록 국가가 모든 생산 부문을 계획하고 통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집니다.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계획 경제를 몇십년 해 왔는데 아직도 잘 안되는 이유가 뭔가’라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계획 경제는 분배를 위한 경제 체제이지 생산의 효율성을 위한 체제는 아닌 것입니다.
북한 당국 스스로도 북한 경제 체제의 문제점을 알기 때문에 우선 시범적으로 나진·선봉 개발 전략을 채택한 것 아닙니까 ?

그 점에 대해서도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북한 당국자들조차 잘 이해를 못하고 있지요. 북한 당국이 나진·선봉 개발을 추구하는 데는 몇 가지 목표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 지역을 외국에 개방함으로써 북한의 대외 이미지를 높이겠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외화 획득입니다. 세 번째는 중국의 경제 특구에서 보듯, 나진·선봉 지역을 외국의 기술·자본·경제동향 등을 북한 본토로 유입하거나 북한 상품을 외국에 수출하는 창구로 활용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토의 경제 체제가 개혁되지 않고서는 이러한 북한 당국의 기대는 현실화하기 어렵습니다. 중국 경제의 고도 성장도 경제 특구 운영과 더불어 경제 체제 자체에 개혁이 뒤따랐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북한 체제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무엇을 어떻게 개혁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몇 가지 기본 요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생산 수단에 대한 국가 소유 형태를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산 수단의 형태 변화 없이는 가격 개혁도 불가능합니다. 한 사람이 모두 소유하는데 합리적인 가격 설정이 가능하겠습니까. 또 내부 개혁이 경제 발전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무역 관계를 통한 외국과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선진 자본과 기술을 끌어들여야 하고 외국 시장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게 안되면 기술 도입도 불가능하고 자본 형성도 어렵습니다. 외국 시장을 얻기 위해서는 외교 노선을 대결 외교에서 친선 외교로 전환해야 합니다. 이는 계급투쟁론을 중심으로 한 적대적 이념의 청산을 의미합니다. 셰바르드나제는 ‘평화 공존과 계급 투쟁은 공존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계급투쟁론의 포기 없이는 대결 외교와 팽창 외교 그리고 이에 따른 과도한 군사력 육성 등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북한에 계급투쟁론을 포기하라는 것은 바로 북한의 통치 이념인 주체사상을 포기하라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한마디로 북한 체제의 골간이 뒤바뀌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런 개혁이 이루어진다고 할 때 북한의 현 체제가 유지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분명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바로 이 점에 오늘날 북한 당국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우선 분명한 것은, 북한이 체제 개혁을 단행하지 않고서는 21세기에 자생력을 갖춘 국가로 존립하기 어렵습니다. 이미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개혁을 추진할 경우 그것은 북한 체제의 와해로 귀결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우선 김정일 체제의 약화가 필연적일 것입니다. 현재 북한에서 김정일은 당과 국가와 인민의 정점에 있습니다. 개혁을 진행하면 이 유기적 연관 관계의 고리가 느슨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국가 소유를 민간 소유로 전환할 경우 지금처럼 모든 국가 기업을 장악하고 있는 당의 영향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고, 이는 결국 김정일의 권력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현재 북한은 주체사상, 유일영도체제, 그리고 중앙통제식 계획경제 체제가 삼위일체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쪽의 변화는 다른쪽의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고, 다른쪽의 변화가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돼 있습니다. 경제관리 체제를 바꾸게 될 경우 그것은 주체사상과 유일영도체제 등 북한 통치 체제의 골간을 뒤흔들게 될 것입니다.

북한의 개혁 과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했는데, 어떤 방법으로 도울 수 있다는 것입니까?

두가지 면에서 한국이 북한의 개혁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소극적인 측면인데, 한국은 미국·일본과의 관계를 통해 북한이 얻고자 하는 바를 방해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적극적인 측면으로, 북한이 개혁 과정에 필요로 하는 기술과 자원은 한국의 도움 없이는 획득하기 어렵습니다. 당장 나진·선봉 지역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1백50억달러도 한국이 국제 금융기관에 차관을 보증하는 방법을 통해 조달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이나 일본의 자금도 도움이 되겠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것이고 본질적인 것은 될 수 없습니다. 한국은 또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고 지리적으로도 가까울 뿐 아니라 북한을 같은 동포로 인식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습니다. 중국의 경제 발전 역시 해외 화교 자본의 유입이 결정적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어요.

북한이 붕괴하면 통일이 앞당겨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한국의 대북 정책 성패 여부는 북한이 빨리 붕괴하도록 붕괴 여건을 조성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북한 체제가 붕괴하지 않도록 하는 데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이 당장 붕괴하면 지금 같은 교착 국면보다 나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 한국이 대북 정책의 핵심을 북한 체제 붕괴에 두고 그같은 정책을 수립하고 실천해 북한이 붕괴 위험에 직면하면, 북한은 가차없이 전쟁을 일으킬 것입니다. 이는 한반도에서 7천만 동포의 파멸을 의미합니다. 또 이렇게 해서 북한이 붕괴할 경우 그 후유증은 엄청날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북한 사람들은 시장 경제 체제에 대한 훈련이 전혀 안돼 있습니다. 국가가 모든 것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이 북한을 흡수 통일한다고 할 때 한국 정부가 이를 감당할 능력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흡수 통일을 배제하고 북한이 개혁을 통해 체제 자생력을 갖추도록 도와주면서 자연스럽게 두 체제가 하나로 수렴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부작용이나 후유증 없이 통일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정부의 대북 정책이 난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안이 있습니까?

우선 대북 정책을 정립하는 시험장으로 나진·선봉 지역을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진·선봉 지역 진출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북한에 대한 경제 진출뿐 아니라 남북관계를 풀어나가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중장기적인 관점으로는, 북한의 개혁·개방 과정에서 혼란이 발생해도 한국 정부가 이를 북한의 주권 찬탈이나 흡수 통일의 기회로 활용하지 않겠다는 것을 북한 당국에 확신시켜 줄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북한이 안심하고 체제 개혁을 단행할 수 있도록 시간적 여유를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국이나 베트남이 이미 체제 개혁에 착수하고 있는데도 북한이 개혁을 못하는 것은 한국 때문입니다. 개혁 과정에서 나타날 혼란상, 그리고 개방이 몰고올 체제 위기를 한국이 흡수 통일의 기회로 활용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한국은 한반도에 이해 관계를 가진 미·일·중·러를 설득해 북한이 개혁·개방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야 합니다. 현재 주변 4강은 북한이 급격하게 붕괴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따라서 한국은 이들에 대해 한국의 기본 입장을 설득하고 외교력을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현재의 외교 안보 체제를 가지고 그런 고도의 외교력과 대북 협상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게 문제입니다. 현재 정부 외교안보팀에 북한의 체제·권력·이념에 정통한 사람이 없어요. 또 그동안 통일원장관이 수시로 바뀌는 등 정책의 일관성도 결여돼 있습니다. 오늘날 북한 문제 자체가 복잡 미묘한 성격을 띠고 있고, 또 주변 4강이라는 변수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고도로 세련되고 노련한 외교가 필요합니다. 또 국내적으로는 북한 문제를 둘러싸고 보수와 진보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데 이들 양자를 설득해 끌고 가야 합니다. 이런 복잡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현재와 같이 북한에 대한 전문적 식견이 없는 인사들의 상식적 판단에만 맡겨 두어서는 곤란합니다. 각계의 북한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팀이 필요해요. 이들 전문가가 대북 정책의 각 방면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해서 합리적인 정책을 끌어내야 합니다. 또한 대북 정책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그 업무를 담당할 수 있도록 배려해 업무의 전문성과 일관성을 유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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