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꽃 필 무렵은 언제인가
  • 글 · 사진 강운구(사진가) ()
  • 승인 2000.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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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절기는 참으로 철묘하다. 엊그저께까지, 여름은 영 물러갈 것 같지 않게 날리를 치더니, 추석이 가까운 어느날 밤에 갑자기 서둘러 사라졌다. 올 한가위는 여느 해보다 빨리 왔으나 기온은 더 썰렁했다. 그러나 가을이 채 오지 않은 공백 같은 시기였다. 그러므로 햇 곡식으로 차린 메를 드신 조상님들은 드물었겠다.

해가 점점 짧아지면, 식물들은 올 한 해도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을 눈치채고 열매를 여물게 하는 데 온 정성을 쏟는다. 거의 다가 봄에 아우성치듯이 한꺼번에, 그리고 몇 가지만이 뒤늦게 '나도요!'하며 여름에 꽃을 피운 것들이다. 그런데 짐짓 성질 느긋한 체 딴청을 부리다가, 다른 것들이 마무리하려 할 때쯤 부스스 꽃을 피우는 것들도 있다. 갈대·억새·들국화 같은 것들과 곡식으로는 메밀이 있다. 늦게 피웠더라도 이삭을 맺어 종족 보존은 해야 하므로 가을의 마지막 빛까지 빨아들이며 늑장을 부린다. 그러나 짧은 기간에 실하고 큰 열매를 맺을 수가 없기는 사람 세상이나 다를 바 없다.

 
'산 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 선생의 그 유명한 <메밀꽃 필 무렵>의 한 문장이다. 그 무대는 강원도 평창의 봉평 일대이다. 이제 먹고 살만해지자 사람들은 그 <메밀꽃 필 무렵>을 떠올리곤, 사라진 메밀꽃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흔히 있는 거을 있는 그대로, 또는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그 자체로서 바라보기보다는 어떤 평판과 그에 깃든 사연을 따르기를 좋아한다. 순박한 메밀밭을, 메밀밭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서보다는 한 소설의 무대로서 바라보기를 더 좋아한다. 그래서 봉평 아닌 다른 곳의 메밀밭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것은 그저 보통 메밀밭일 뿐이다.

''어디는 무슨 소설에 나온 곳이라더라’ 그리고 ‘어디는 무슨 영화에 나온 곳이야’ 하며 그 자체보다는 그곳을 써먹은 매체의 보증을 더 신뢰하는 듯하다. 봉평 근처 메밀밭을 사람들이 기웃거리는 것은 아마도 메밀꽃 그 자체가 아니라 <메밀꽃 필 무렵>의 시대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마디풀 과인 메밀은 중앙아시아가 원산지이다. 식물 사전에 보면 9∼10월에 꽃을 피우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메밀꽃 필 무렵은 당연히 그때이리라.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다. 메밀은 성장 기간이 짧은 식물이어서 2모작이 가능하다. 그래서 강원도 일대에서는 6∼7월도 메밀꽃 필 무렵이다. 그런데 봄이거나 가을이거나 간에 봉평 근처에서 ‘산 허리는 온통 메밀밭’인 곳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오히려 충청도 옥천군 청성면의 한 산허리가 온통 메밀밭인 것을 보았다. 그곳에서는 유장하게 흐르는 금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였으며, 벌들은 그 메밀밭을 떠메고 갈 듯이 바쁘게 붕붕댔다. 어쩌다 아름다운 메밀밭을 만나서 기쁘게 한나절을 바친 적이 있다. 한가위라고 고향에 간들, 메밀밭 따위에 문안을 올릴 겨를은 아마도 있기 어려울 것이다. 사상 최악이었다는 귀경 전쟁의 대열에 끼기도 바빴을 터이니.

요즘은 꽃만 보려고 메밀을 심는 곳이 더러 있다. 이삭은 바라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그야말로 ‘꽃’이 되는 것은 작물로서 격상일까 아니면 타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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