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과 허세 뒤엉킨 기막힌 ‘가면 인생’
김찬경 미래저축은행 회장, 가짜 서울대생 등 비정상 행적 보여 이명박 대통령이 참여한 고려대 APCA 1기에도 등록
김회장은 단순히 학력을 속인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군 제대 후인 1979년부터 본격적으로 서울대 법대생 행세를 했다. 법대 강의도 듣고, 각종 동아리 모임에도 나왔다. 법대 복학생 모임인 ‘법우회’ 대표까지 맡았을 정도이다. 결혼식 때는 법대 학장이던 황 아무개 교수가 주례를 섰다. 당시 피로연에는 서울대 법대 학생들도 참석했다고 한다. 주례를 섰던 황교수는 나중에 이런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대우그룹에 입사할 때도 가짜 이력서 제출
김회장의 부인도 결혼 당시에는 그가 서울대 법대생인 줄로 알았을 정도이다. 그의 ‘서울대생 행세’는 무려 4년간이나 지속되었다. 당시 법대생과 교수들까지 완벽하게 속일 정도로 수완(?)이 좋았다. 그만큼 언변과 사교성이 뛰어났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완전한 가짜’가 되지는 못했다. 1983년 졸업 앨범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거짓 행각이 들통 나고 말았다. 학교측이 사진 밑에 학번과 이름을 넣기 위해 학적을 확인했지만 검색이 되지 않았다. 그때서야 비로소 가짜임이 드러났다. 김회장의 나이 27세 때였다. 김회장의 ‘서울대생 행세’는 일간지에 실릴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경향신문 1983년 2월16일자 2면에 기사로 보도되었다. 김회장은 가짜임이 탄로난 뒤에도 서울대 법대생들과 연락을 지속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가짜 인생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아니다. 1985년 대우그룹에 입사할 때에도 학력을 속였다. 그는 이력서의 학력 란에 ‘서울대 법대 졸업’이라고 썼고,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허술한 ‘입사 지원 시스템’을 악용한 것이기도 하다. 그의 가짜 학력은 입사 3개월 만에 탄로 났고, 회사에서 해고당했다. 김회장은 그 뒤에도 이력서 등에 ‘대전고’ ‘신구대학 경영학과 졸업’ 등으로 적었지만 모두 거짓이었다.
그렇다면 김회장은 어떻게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을까. 1980년대 후반 부동산 시행업에 뛰어든 것이 먹혀들면서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이를 밑천으로 1999년에 금융업에 손을 댔다. 제주시에 본점을 둔 대기상호신용금고를 인수했고, 2002년에는 상호를 미래상호저축은행으로 변경했다. 이후 충남 예산저축은행과 서울삼환저축은행을 인수하면서 몸집을 불린 뒤 전국구 은행으로 탈바꿈한다. 최근까지 업계 10위권 은행으로 키우면서 ‘성공한 금융인’으로 화려한 조명을 받았다. 하지만 속은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불법 대출한 금액과 김회장의 횡령액은 수천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고객 돈을 사유화하면서 흥청망청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가짜 인생’의 말로를 보여주는 것이다.
김회장의 기이한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최근 그가 언론에 조명되면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들이 수면으로 떠오르고 있다. 김회장은 금융채무불이행자(신용불량자) 신분이었다. 그는 건설회사 ㈜태산을 함께 경영하면서 1999년 대한주택보증으로 58억원을 빌렸고, 회사의 대주주 자격으로 연대 보증을 섰다. 하지만 2007년 회사가 파산하면서 김회장은 원리금 1백64억원을 갚지 못했다. 결국 지난해 3월 법원 확정 판결에 따라 채무불이행자로 은행연합회에 등록되었다.
서울대 법대 최고지도자 과정도 다녀
김회장은 또 2009년에는 서울대 법대 최고지도자 과정(ALP) 10기에도 다녔다. 서울대 법대생 행세를 하다 들통 난 지 16년 만이다. 당시 함께 수강했던 유력 인사 중에는 청와대 인사, 여야 국회의원, 사정기관 간부 등이 등록했었다고 한다. ALP 과정을 수료한 뒤에는 서울대 법대 동창회 명부에도 이름을 올렸다. 지금도 원우 자격으로 동창 명부에 올라 있다.
지금까지 김찬경 회장의 인생 역정은 엽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기이했다. 그가 불굴의 도전 정신으로 성공 신화를 만들어갔다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바른길보다는 거짓을 선택했다. 옳은 길보다는 부정한 것을 찾았다. 결국 고객 돈을 빼내 해외로 도망가려다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