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젠더 갈등이 다시 ‘트럼프 대통령’ 만들어냈다 [임명묵의 MZ학 개론]
페미니즘 비난하는 청년 남성 커뮤니티 ‘매노스피어’가 일등공신 청년 여성은 해리스 낙선에 낙심…2년 전 한국 대선 풍경 데자뷔도
11월5일, 2024년 한 해의 대미를 장식할 선거가 있었다. 2020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에 패배한 ‘전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대선에 재도전하는 날이었다. 민주당에서는 고령으로 노쇠한 조 바이든 대통령이 선거 캠페인에서 물러나자, 최초의 유색인 여성 부통령인 카멀라 해리스를 대선후보로 지명했다. 미국에서 현재 진행되는 문화 정체성 갈등을 상징하는 후보 구성이었고, 많은 언론은 선거 직전까지 ‘박빙’을 예상했다. 하지만 결과는 트럼프의 대승으로 나타났다.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 전역에서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를 두고 아직도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흥미로운 것은 트럼프의 대승을 만들어낸 새로운 유권자 그룹의 등장이었다. 2016년이나 2020년만 하더라도 트럼프 지지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옛날의 강력한 미국’에 대한 향수를 품고 있는 중장년층과 노년층의 백인 남성이었다. 반면 1990년대 이래로 민주당 지지자는 대도시에 거주하며, 나이가 젊고, 고학력에 다양한 소수인종과 여성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물결이 바뀌고 있음이 드러났다. 여전히 해리스는 청년층과 소수인종, 여성에게서 더 많은 표를 얻어냈지만, 2020년 바이든이 트럼프를 상대로 거둔 격차를 유지하지는 못했다. 2020년 청년 남성 중 56%가 바이든에게 표를 던졌지만, 2024년에는 56%가 트럼프에게 투표했다. 청년 여성의 트럼프 투표율도 같은 기간 33%에서 40%로 올랐다. 인종 면에서도 트럼프의 청년 지지 기반은 확대되었다. 45세 미만의 흑인 남성 중 30%가 트럼프를 찍었는데, 이 역시 직전 선거의 두 배나 되는 수치다. 미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소수인종인 히스패닉(라티노) 남성도 트럼프 지지율이 2020년에는 40%를 기록했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50%로 상승했다. 단순히 중장년층 백인들뿐 아니라, 다양한 출신의 청년 남성을 위주로 트럼프 지지층이 더 ‘젊어지고’ 있는 셈이다.
청년층의 문화 정체성 둘러싼 갈등이 변화 이끌어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했을까? 가장 설득력 있는 답은 인플레이션이다. 코로나 팬데믹 대응을 위해 공급한 유동성의 여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발생한 글로벌 공급망 위기로 바이든 행정부 4년 내내 인플레이션은 정권의 가장 큰 약점으로 부상했다. 인플레이션은 청년층의 경제적 곤경을 더욱 심화시켰고, 이를 주된 정권 비판 논리로 사용한 트럼프에 더 많은 청년 유권자들이 이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 문제는 가장 중요한 이슈이긴 했지만, 모든 상황을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트럼프의 인플레이션 공격에 민주당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맥없이 무너지며, 청년층이라는 전통적 지지 기반까지 허물어지게 된 사태에는 문화 정체성을 둘러싼 갈등이라는 다른 요인도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과거 민주당 지지 유권자 그룹은 노동조합을 지지의 축으로 삼고, 광범위한 사회보장 프로그램을 통해 소수인종을 끌어들이며 만들어졌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민주당도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면서, 민주당이 중점으로 삼는 의제는 경제에서 문화로 이동했다. 2008년에 등장한 오바마 행정부는 의료보험 정책을 비롯한 몇몇 사회보장 프로그램을 추진했지만, 민주당에서 가장 활동적인 유권자 그룹은 성평등, 성소수자, 인종 운동 등 정체성 차원에서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되었다. 그 결과 민주당 지지층이던 노동자 계층이 새로운 이념으로 공화당을 장악한 트럼프에게로 이탈한 것이 2016년 대선이었다.
바이든 행정부는 2016년 당시의 패인을 분석하며 빌 클린턴과 오바마 시기에 추진했던 세계화 경제 정책을 뒤집었다. 노동조합을 강화하고, 국내 제조업 생산을 장려하는 산업 정책을 추진하며 집토끼를 복원하고자 했다. 하지만 경제 면에서 정책 전환은 인플레이션을 관리하지 못하면서 성과로 홍보될 수 없었다. 그 대신 민주당을 상징하는 이슈는 정치적 올바름 운동이 되었고, 이는 백인 남성의 기독교 문화가 미국 문화의 뿌리여야 한다는 트럼프주의에 반대하는 차원이 강했다. 민주당이 트랜스젠더 혹은 불법 이민자 이슈에서 트럼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면 낼수록, 민주당은 ‘물가도 못 잡으면서 문화적 급진주의밖에 내세우는 게 없는 정당’이라는 비난에 취약해지는 함정에 빠졌다.
반대로 트럼프 진영은 앞서 언급한 대로 기독교에 근거한 미국의 전통을 강조하는 보수주의 프로그램으로 민주당의 문화 의제에 끌려다니던 기존 공화당을 대체했다. 여기에는 인터넷에서 밈을 생산하는 청년 남성층 인구의 합류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다. 2014년에 게임을 둘러싼 문화 갈등인 ‘게이머게이트’가 시작되면서 ‘미국판 디시인사이드’라고 불리는 4chan은 문화적 진보주의에 반대하는 수많은 사람이 모이는 급진적 우파 커뮤니티로 진화했다. 이들이 생산한 밈은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를 타고 퍼져 나갔고, ‘남성성 이슈’에 천착하며 페미니즘을 비난하는 인터넷 세계인 ‘매노스피어(manosphere)’로 진화했다. 도널드 트럼프의 아들 배런 트럼프는 아버지에게 매노스피어를 잡아야 한다고 주문했고, 트럼프는 청년 남성층이 좋아하는 게임 스트리머 및 팟캐스트 방송에 출연하면서 새로운 유권자 그룹에 직접 다가갔다. 이들은 온라인상에서 트럼프를 지지하는 가장 활동적인 유권자 집단으로서 단순한 표 수를 넘어서는 영향력을 선거 과정에서 발휘했다.
美 청년층 성 갈등, 한국에도 영향 미칠 전망
이제는 반대 움직임도 등장했다. 미국의 청년 여성층이 해리스 낙선에 낙심하며, 한국으로 눈을 돌려 한국 페미니즘 운동을 배우려는 물결이 일고 있다. 온라인상의 성별 갈등이 주변적인 곳에서만 머물지 않고 정치의 중심을 흔들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음을 보여준 우리나라의 지난 대선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풍경이다. 미국에서도 앞으로 청년 남성과 여성을 둘러싼 정체성과 문화 갈등이 더욱 격렬해질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앞으로도 온라인에서 매우 활동적인 청년 남성과 여성이 주도하는 의제에 대응하면서 정책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은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청년 여성 네티즌은 미국에서 한국의 사례를 모방하겠다는 지금의 움직임에 크게 고무되고 있다. 반대로 청년 남성 네티즌은 문화적 진보주의에 ‘한 방’을 날린 트럼프의 재선과 비벡 라마스와미를 비롯한 젊은 정치인의 등장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아마 트럼프 2기 동안 진행될 문화 논쟁 양상은 한국 온라인 공간으로 수입되며 한국의 현재 청년 여론 지형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관세, 방위비 등의 이슈뿐 아니라 트럼프가 개시할 문화 정책의 동향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