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수화물 중독’은 병인가 [오윤환의 느낌표 건강]
스스로 끊기 어렵다면 정신건강 전문가나 영양사의 도움 받아야
최근 비만과 대사증후군, 당뇨병 유병률 상승과 더불어 고탄수화물 식단과 정제 탄수화물 섭취 증가가 중요한 문제로 제기된다. 흔히 ‘탄수화물 중독’이라고 하는데, 이 표현은 주로 단맛을 내는 정제된 탄수화물(설탕·과당·밀가루 등)에 대해 통제되지 않는 갈망, 지속적인 과잉 섭취 그리고 섭취 중단 시 금단 증상을 호소하는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다. 의학 및 정신의학 진단 매뉴얼에서 탄수화물 중독이라는 독립적 진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폭식 장애나 폭식증 같은 식사 장애 내에서 특정 증상을 다룬다.
이러한 탄수화물 중독이 실제 질병인지 아닌지는 크게 두 가지 관점으로 나뉜다. 하나는 탄수화물 중독이라는 것이 의학적·심리학적 실체가 있으므로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탄수화물 특히 단순당이 뇌 보상 회로를 과도하게 자극해 마치 약물중독과 유사한 패턴을 보이며, 이에 따라 개인이 탄수화물 섭취를 억제하기 어려운 상태를 질환 개념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음식 섭취는 생리적인 필요에 근거하는 행동이며, 음식 자체가 약물과 유사한 의존성을 초래하는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중독’이라는 용어 자체가 병리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과도한 탄수화물 섭취를 단순한 식습관 문제나 환경적·행동경제학적 요인으로 설명할 수도 있으므로 질병으로 보는 건 과하다는 주장이다.
일부 통제 불가능한 섭취 행동을 유발
탄수화물 중독이 질병이든 아니든 임상적 의미에 대해서는 살펴볼 수 있다. 우선 비만 및 대사증후군과의 연관성이다. 만약 의지력 부족이나 식습관 문제를 넘어 특정 탄수화물 식품에 대해 중독에 가까운 강박적 섭취 패턴을 보인다면 전통적인 식단 조절이나 단순한 칼로리 제한 치료로는 개선이 어려울 수 있다. 이 경우 심리치료나 행동수정 프로그램, 중독 치료 기법(인지행동치료·동기강화면담 등)이 필요하다.
또한 우울증과 불안 등 정신과적 동반 질환과의 연관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탄수화물을 먹으면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돼 기분이 좋아진다. 따라서 우울증이나 불안장애가 있는 환자는 탄수화물 섭취를 일종의 ‘자기치료’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장기적으로 식이 통제 상실과 체중 증가로 이어질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공중보건 관점에서 살펴보자면 고도로 정제된 탄수화물, 특히 첨가당이 넘쳐나는 환경에서 이러한 식품을 자주 접하면 대중 건강에 명백한 위협이 될 수 있다. 설탕 함량이 높은 음료나 간식류에 중독적 성향을 보이는 개인, 특히 청소년과 아동이 증가할 경우 비만, 당뇨병, 심혈관질환 위험 상승은 물론이거니와 의료비 증가와 생산성 감소 같은 사회경제적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물론 탄수화물 중독 개념에 대한 비판도 없지는 않다. 음식 자체가 아닌 음식의 ‘맥락’(스트레스 과다, 수면 부족, 사회적인 압력 등)이 과잉 섭취를 유발하는 원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설탕 권하는 사회’가 문제인 것이지 설탕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현재까지 음식 중독이나 탄수화물 중독과 관련한 연구는 주로 동물실험이나 관찰연구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규모 무작위대조군연구를 통해 명확하게 인과관계를 입증한 연구는 아직 부족한 실정이다. 따라서 탄수화물 중독은 아직 공인된 임상적인 진단은 아니다.
그러나 정제 탄수화물이 뇌 보상 회로를 자극하고, 일부 사람에게서 통제 불가능한 섭취 행동을 유발한다. 탄수화물 섭취 관리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라면 정신건강 전문가나 영양사와의 상담이나 행동치료를 통한 식이 수정 전략 등이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