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난’ 주인공의 졸렬하고 부끄러운 모습 [윤평중의 시시비비]
한국 문명의 토대인 민주공화국 보편 규범을 파괴…그러고도 “끝까지 싸울 것” 선동해 ‘다수의 폭정’ ‘이재명 유일 체제’ 구축한 민주당도 민주공화정에 대한 배신 아닐 수 없어
윤석열 대통령은 위헌적 비상계엄 선포로 민주공화국을 배신했다. 12·3 친위쿠데타를 전후한 대통령의 불법적 행적이 낱낱이 폭로되면서 국민의 분노와 고통이 임계점을 향해 치닫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은 공수처가 ‘내란 수괴’ 혐의로 청구한 체포영장을 법원이 발부하자 경호처를 앞세워 집행을 거부한다. 현직 대통령이 법치주의를 정면에서 거역하고 있다.
“계엄 선포와 관련하여 법적·정치적 책임 문제를 회피하지 않겠다.” 지난해 12월7일 윤 대통령 대국민 담화다. 지금 윤 대통령은 자신의 발언조차 뒤집는다. 2025년 1월1일엔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라며 극렬 지지자들을 부추기기까지 했다. 윤 대통령의 졸렬한 모습이 부끄럽고 개탄스러울 뿐이다.
‘히틀러 전체주의’는 극우 대통령의 비상대권에서 시작
12·3 사태는 ‘윤석열의 난(亂)’이다. 윤석열의 난은 현대 한국 문명의 토대인 민주공화국 공통 규범을 파괴했다. 그 해악을 필설로 형언하기 어렵다. 한국 시민들을 모욕했고 한반도 역사의 정점을 향해 상승하던 국격을 수직 추락시켰다. 세계 그레이트 게임의 폭풍 속에서 국가 대전략을 실종시켰다.
나라의 운명과 국민 생명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간 윤 대통령의 망동은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 헌재에서의 탄핵 인용은 정당하거니와 윤 대통령의 내란과 외환 혐의가 법원에서 최종 확정된다면 상응하는 중벌이 마땅하다. 민주공화국은 그 사법 정의 위에서만 존속 가능하다.
윤 대통령의 친위쿠데타가 만들어낸 또 다른 중대 범죄가 있다. 윤석열의 난은 ‘비상대권’이라는 역사의 악령을 깨웠다. 선진적 민주주의였던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대혼란은 히틀러에게 꽃길을 깔아주었다. 1930년 하인리히 브뤼닝의 소수 여당은 국정 안정을 명분으로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긴급명령권(바이마르 헌법 제48조)에 의탁했다. 총체적 국정 혼란 속에 1932년 프란츠 폰 파펜과 슐라이허 총리의 소수 여당은 각기 100여 일과 50여 일 지속됐을 뿐이다.
엘리트 정치인들의 무능과 결탁한 극우 대통령의 긴급명령권 남용, 즉 비상대권이 유례없는 전체주의의 방아쇠를 당겼다. 히틀러는 1933년 입법권을 행정부에 위임하는 수권법을 폭력과 협잡 속에 통과시키고 상시적 비상대권을 행사하는 총통으로 등극한다.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잉태한 극우 반동체제의 등장이었다.
역사는 경고한다. 극우 반동은 극좌 반동을 부를 수 있다. 윤석열의 난 이후 권력 공백과 사회 혼란, 경제위기를 틈타 준동하고 있는 극우 반동과 극좌 반동의 대두를 막는 게 한국 정치의 화급한 과제가 됐다. 윤석열의 난이 독재자의 비상대권이라는 역사의 망령을 무덤에서 다시 불러냄으로써 한국 사회에 재앙을 투척했다.
12·3 친위쿠데타는 권력 지형의 ‘파국적 평형상태’를 강제로 깨트리려는 시도였다. 대통령 권력과 입법권력이 국가 통치권을 두고 다투는 이중권력을 무력으로 해소하려 했다. 윤석열의 난이 성공했다면 한국 사회는 수십 년 퇴행하고 반동의 시대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한국 시민사회가 그것을 용인할 리 없으므로 폭력으로 귀결됐을 가능성이 컸다. 우리는 시민사회의 힘으로 대재앙을 가까스로 피한 것이다.
하지만 여소야대 분점정부는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값이다. 자유선거를 통한 권력 교체로 갈등을 해소하고 대화와 타협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게 민주정치의 원칙이자 상식이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은 시대착오적인 권위주의 통치로 일관해 정치 기반을 허물었다. 헤게모니를 잃은 대통령의 위헌적 비상계엄과 전쟁 정치는 자멸할 수밖에 없었다.
12·3 내란 이전, 정부·여당과 민주당의 무한 대치가 헌정 체제의 한계와 맞물려 국정 교착을 불렀다. 헌법 제65조에서 국회의 탄핵소추권을 인정하면서도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은 없는 게 대표적이다. 대통령과 국회의 무한 대결이 초래한 저강도 내전을 풀 제도적 출구와 타협적 정치 문화의 부재가 파국의 배경이 됐다. 여기엔 여야 모두 책임이 있다.
윤 대통령 옹호하는 수구 국민의힘도 설 자리 없어
윤석열의 난이라는 팩트 자체를 부인하는 국민의힘 앞날엔 암운이 짙다. 민주공화정을 파괴하려 한 대통령을 옹위하는 수구 보수가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지금은 ‘박근혜 학습효과’에서 나온 보수 괴멸 두려움과 ‘이재명 민주당’에 대한 혐오로 지지층이 결집하고 있지만 상식을 지닌 다수 시민이 외면하는 수구 정당에 정치적 미래가 있을 리 만무하다. 소멸 위기인 한국 보수가 부활할 수 있는 길은 민주공화국 헌법 정신에 충성하는 것뿐이다.
공직자 연쇄 탄핵으로 파국을 부른 민주당의 행태도 ‘다수의 폭정’이라는 민주주의의 폐단을 보여준다. 지난 2년 반 ‘이재명 유일 체제’로 화석화한 민주당의 모습은 정통 민주정당에 대한 배신이 아닐 수 없다. 행정권력과 입법권력을 한 손에 쥔 민주당 출신 제왕적 대통령이 나타나 폭주한다면 민주공화국 자체가 위태로워진다. 수구화한 국민의힘이 치명적 악수를 연발해도 수구화한 ‘이재명의 민주당’에 민심이 일방적으로 쏠리지 않는 이유다.
불행하게도 한국 현대정치사에선 퇴행적인 거대 양당의 현실 규정력이 압도적이다. 두 거대 정당의 적대적 진영논리가 국민을 볼모 삼고 있다. 진영 대결의 증오와 분노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분권형 개헌과 선거법 개정이 필수적이다. 지금은 용암처럼 끓고 있는 시민들의 집합적 에너지로 거대 양당의 볼모 정치를 깨트릴 최적의 시점이다.
윤석열의 난은 대한민국 민주공화정이 반석 위에 있지 않다는 쓰라린 현실을 폭로했다. 민주공화국을 반듯하게 세우는 일은 우리 현대사 최대의 도전이다. 한국 진보와 보수는 민주공화정의 기본틀을 공유하는 경쟁자이지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니다. 그게 K르네상스로 상징되는 현대 한국 문명의 공통 규범이다.
한국 사회는 윤석열의 난으로 인해 최악의 위기를 통과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의 질곡을 넘어 참혹한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폐허에서 선진국을 이루었으며 세계가 놀라는 민주주의를 세웠다. ‘인식의 비관론과 의지의 낙관론’으로 혼란을 뚫고 나가야 한다. 민주공화정의 적을 물리치고, 가야 할 미래로 전진해야만 한다. 새롭게 되새기는 민주공화국 시민의 새해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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