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여론 수렴한 정책의 함정 주의해야

2025-01-17     이진우 MBC 《손에 잡히는 경제》 앵커

우리나라의 독신 1인 가구는 공공임대주택에 들어갈 때 큰 집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집의 면적이 35㎡보다 넓은 곳에는 1인 가구가 들어갈 수 없고, 2인 가구는 44㎡가 최대한이라는 규제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규제가 작년 10월에 사라졌다. 혼자 사는 사람은 좁은 집에서만 살라는 말이냐는 여론 때문이었다. 이 일 때문에 35㎡나 44㎡의 집은 사람이 살기 어려운 집이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앞으로 공공임대주택은 이보다 더 넓은 크기로 지어질 예정이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꽤 바람직한 변화로 보이기도 하고 기껏해야 아주 작은 해프닝처럼 보이는 사건이지만 이 일은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 살 만해진 중산층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여전히 가난한 소수의 저소득층이 아무도 모르게 희생되는 결과를 낳는,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사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2024년11월1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아름드리홀에서 김은정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이 2025년 공공임대주택 예산안 분석 취지와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공공임대주택이라고 해서 낡고 좁고 지저분해야 할 필요는 없다. 국민의 눈높이가 높아졌다면 공공임대주택도 면적을 키워야 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는 데에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정말 국민의 눈높이가 높아져 더 이상 35㎡짜리나 44㎡에는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상황인가에 대한 판단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더 큰 면적의 임대주택을 지으려면 더 적은 숫자의 공공임대주택이 지어지는 걸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의 눈높이가 이제는 그런 좁은 집에서 거주하는 게 불편할 만큼 높아졌다면 35㎡나 44㎡ 공공임대주택에는 입주 신청자가 없거나 적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청자는 늘 넘친다. 일부 수요자가 그 면적에 불만을 제기하고 있을 뿐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간혹 신청자가 부족한 임대주택도 있으나 그런 곳에는 그보다 큰 면적의 공공임대주택에도 공실이 있다. 공공임대주택의 면적이 문제가 아니라 그 집의 위치가 문제라서 생기는 일이라는 방증이다.

35㎡나 44㎡의 집이 살기 어려울 만큼 좁게 느껴질 수 있겠으나, 여전히 ‘그 정도 크기의 집이라도 나는 괜찮으니 나에게 그런 집을 빌려 달라’는 수요가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일부 수요자의 불평에 눈높이 높은 중산층이 가세해 ‘맞다 너무 좁다’는 결론을 이끌어낸 후 기준을 바꿔버렸다. 거주 면적을 넓혀 달라는 국민청원이 올라왔고 수만 명이 이에 동의한 결과다. 이제 더 넓은 면적의 임대주택이 지어질 것이고 지어지는 집의 숫자는 줄어들 것이다. 다수의 공공임대주택 당첨자들은 과거보다 더 넓은 집에서 거주하게 되겠지만, 35㎡라도 좋다는 저소득층 중에 누군가는 공공임대주택에 거주하지 못하고 더 열악한 집에서 살아야 하는 결과가 생겼다.

이렇게 정부의 예산과 정책의 보살핌이 종종 사회의 밑바닥 계층이 아닌 중산층의 눈높이에 맞춰지는 일은 종종 관찰된다. 얼마 전 서울시가 내놓은 ‘미리내집’이라는 정책도 그런 사례다. 장기임대주택에 거주하다가 아이를 출산하면 그 집을 시가보다 10~30% 저렴한 값에 매입할 수 있게 한 것인데, 시가의 10~30%면 2억~10억원에 해당하는 돈이다. 안정적인 주거 이외에 내 집을 매입해 자산 증식도 함께 하고 싶다는 전형적인 중산층의 욕구를 정책으로 떠안은 결과다. 이 돈을 중산층 한 명에게 나눠줌으로써 ‘자산 증식보다는 일단 월세가 저렴한 임대주택이라도 절실하다’는 저소득층 수백 명이 소외받게 됐다.

이런 일들이 종종 벌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중산층의 목소리가 저소득층의 목소리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저소득층은 국민청원에 글을 올릴 시간도 없고 그런 제도가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중산층도 우리가 보호해야 할 국민임에는 틀림없지만 정책의 재원이 그들에게 투입되는 부분만큼 조용한 서민들에게 돌아갈 몫은 줄어들게 된다. 여론을 충실하게 수렴하는 정책이 빠져들기 쉬운 함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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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 MBC 《손에 잡히는 경제》 앵커